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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신국제질서

#4. 갈등과 전환의 시대, 평화·공생 선도 중견·평화 국가

갈등과 전환의 시대, 평화·공생 선도 중견·평화 국가

 

김수현 (정의정책연구소 연구위원)



1. 외교·안보·남북관계의 다차원적 위기와 관성적 대응

  한국호 앞에 삼각파도가 몰아치는데 사람들은 무심해 보인다. 
  냉전기는 물론이고 탈냉전 이후에도 한국은 위기가 주기적으로 고조되었다. 실제 상황은 위기에 미치지 않거나 남들이 보기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위기 상황이라는 인식이 지배해 왔다. 안보와 남북관계는 대선의 주요 이슈였다. 그런데 20대 대선을 앞둔 지금 사람들은 외교·안보·남북관계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북 핵·미사일의 잇따른 실험, 최고지도자들 간 거친 말싸움이 이어지던 2017년의 전쟁 일보 직전 상황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2018년 한반도의 봄이 2019년 ‘하노이 노딜’의 된서리를 맞은 이후 실망이 커진 탓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대중의 관심은 떨어지고 대선에서의 뜨거운 이슈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외교·안보 및 남북관계가 처한 상황은 지난 몇십 년 동안 맞닥뜨리지 않았던 다차원적 위기이다. 
  2차대전 후 자유주의 진영, 탈냉전 이후 전 세계적 차원의 미국 패권과 미국이 그 패권을 배경으로 보급, 확대시켰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우리 외교·안보 정책은 물론 생존과 성장의 국가전략, 민주화와 그 공고화 등의 정치사회체제 발전을 이루어올 수 있었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COP26 결과가 보여주듯 기후위기에 의해 인류문명 자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국제적 단결과 리더십은 희미하다.
  미·중 전략적 경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한국을 대중포위동맹의 일원으로 동원하려는 미국 대(對) 자국의 전략적 이해가 침해된다고 생각하면 보복도 서슴지 않는 중국으로 인해 한미동맹-한중전략적동반자관계 병행의 원칙이 도전받고 있다. 일본,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개선의 기미도 없다.
  한반도 차원에서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달성하기 위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중단되었으며, 재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재개된다고 해도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 사회는 물론 관련 당사자들의 자신감이 저하되었다. 상대에 대한 전문가와 대중들의 신뢰가 많이 저하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2018년 판문점선언, 군사분야공동합의 등을 만들어냈던 남북관계는 일체의 대화가 끊겼다. 적대적 관계 청산이 우선이라는 북은 물론 대화를 표방하는 한국도 군비증강에 매진 중이다. 말로는 상대가 주적이 아니며, 전쟁을 막기 위해 혹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면서도 상대에게 위협감을 줄 수밖에 없는 군비증강을 지속한다. ‘이중기준이 문제다’라고 하고 그에 호응하는 듯 비판의 톤도 낮추지만, 실제로는 그런 상대에 대해 서로 신경을 쓰고 군비증강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대고 있다. ‘종전선언’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 전 한반도를 초토화시킬 군비증강 대결과 신경전에 전쟁만 일어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도 아슬아슬한 상태이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주변 지역질서, 전 세계적 국제질서 모두 하던 대로 하면 잘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다차원적 변환의 상황인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재 대부분의 대선후보 정책을 보면, ‘남북관계 개선’과 ‘강한(자강) 안보’, ‘한미동맹-한중관계 병행’이라는 기존 정책의 답습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보수정당 후보는 전술핵 재배치, NATO식 핵공유 등 북한이 핵 보유와 강화를 합리화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환 자체를 아예 물 건너가게 할 수 있는 것을 정책이랍시고 제시하는 무지, 무책임한 자세를 보인다. 미국 정부도 비현실적이라 비판하는 정책을 동맹을 가장 중시한다는 정당이 주장하는 아이러니다.
  그런데 보수정당 후보의 나머지 정책은 물론 민주당 후보 정책도 외교·안보·남북관계의 다차원적 위기에 걸맞은 인식과 능동적 해결책이 부재하다. 그리고 대대적 군비증강이 북의 핵 증강 정책 합리화 초래, 핵?미사일 개발 등 강경책과 악순환을 이룰 때 교류협력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코로나19 등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 재정지원도 어렵게 할 가능성을 간과한다. 
  ‘강한 안보’, ‘자주국방’이라는 구호와 달리, 전작권 환수는 계속 지연되는 등 자주성 강화가 아니라 동맹에의 의존을 심화시키고, 미국 군산복합체의 봉 노릇을 지속할 가능성이 크지만, 원인을 제대로 짚고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한미동맹을 유지·강화하는 것을 근간으로 중국과의 전략적동반자관계도 중시하겠다는, 현상유지 차원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균형외교는 강대국 간 갈등이 커지면서 딜레마에 처할 수밖에 없다. 보수정당의 경우 집권 시 ‘사드 배치와 보복’ 사태 같은 것이 심화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만약 기존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 봉착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회의 구성원들, 적어도 리더가 되겠다는 인사들이나 정당 등 조직이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그런 대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총의를 모아 실천해간다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시각과 정책으로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는 것에 그치면,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질서는 우리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우리 국력이 크게 신장했기에 조선-구한 말 국권 상실 정도는 아닐지라도, 명·청 교체기 삼전도의 치욕과 백성의 고통, 광복에도 불구하고 겪었던 분단과 전쟁의 아픔이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래서 먼저 현재의 국제질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진단하고, 기존의 정책이 이런 상황에 제대로 부합하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어떤 대안이 가능한지 제시하고자 한다.


2. 기존 국제질서의 위기 : 갈등과 전환의 시대

  현재 우리 외교·안보가 처한 상황은 만성적인 위기가 지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있는 토대 자체가 흔들리는 중이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미·중 전략적 경쟁 심화와 그 불똥이 우리에게 떨어질 가능성 등만이 아니다.(주: 이런 시각은 패권경쟁, 패권전쟁, 전략적 경쟁 등 개념 정의와 설명, 전략적 함의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미·중을 직접 제목에 달고 있는 각종 서적과 보고서 등뿐만 아니라 ‘신국제질서’ 등 국제질서를 제목에 달고 있는 문헌도 대개 비슷하다. 김흥규 엮음, 2021, 『신국제질서와 한국외교전략』, 명인문화사. ; 홍현익 외 지음, 2021, 『공정한 국제질서와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 시공사. 등.)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기존의 지배적 국제질서인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논자에 따라 정의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다자주의와 국제기구, 이것들을 뒷받침하는 미국의 패권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코로나 19 팬데믹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지만, 기후위기, 양극화 심화에 따른 불만을 배경으로 한 국수주의(극우 포퓰리즘)의 분출, 권위주의적 통치자의 집권과 민주주의 퇴조 등 전 세계적 공통과제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인과 대책 등을 둘러싸고 갈등 중이다. 
  특히 미국은 트럼프 시절뿐만 아니라 국제적 리더십 복원과 동맹을 강조하는 바이든 집권 이후에도 반도체 공급망 안정을 내세워 삼성전자 등 민간기업의 핵심 정보를 강요하는 등 ‘미국 우선주의’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외교·안보 정책의 초점을 ‘중국 견제’에 두다 보니 동맹국 간 갈등을 유발하고, 상당수는 오히려 불편할 수 있는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오커스(AUKUS-미국·영국·호주 동맹) 출범 과정에서 호주가 핵추진잠수함을 가질 수 있게 함으로써 기존 디젤 잠수함 계약자인 프랑스의 반발을 초래한 것 등이 그 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아프간에서의 황급한 철군과 카불 공항의 혼란은 민주주의 확산 및 민주 정부 구축을 명분으로 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주의 혹은 ‘자유주의 팽창주의’의 문제점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등 중국의 배후에 친미 국가를 건설, 유지하는 게 더는 가능하지 않아 군사력을 동아시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미국 국력의 한계, 상대적 하락을 보여준다. 미국의 패권이 물질적 능력과 가치·규범, 패권 유지에 대한 자국의 국내적 의지 모두 상대적으로 감퇴하는 가운데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상대적 쇠퇴에 비해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점점 밀려와 지배)의 시대가 끝나고 아시아가 우뚝 서는 시대, 혹은 중국과 인도 등이 미국과 EU와 주요 국가로 공존하는 다극화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한다.(주: 김상준, 2021,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팽창문명에서 내장문명으로』, 아카넷. ; 파라그 카나 저, 고영태 역, 2021, 『아시아가 바꿀 미래: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바뀌는가』, 동녘사이언스. ; 이백순, 2020, 『대변환 시대의 한국 외교: 포스트 팍스 아메리카나와 우리의 미래』, 21세기북스. 등을 참조 바람.)
 
 [그림 1] 주요국의 세계 GDP 점유율 변화

출처 : Angus Maddison, 2007, Contours of the World Economy, 1-2030 AD: essays in macro economic hist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김상준, 2021, p.116에서 재인용.

  [그림 1]에서 보듯 중국과 인도 등의 총 GDP가 1980년대 혹은 9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170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서세동점 이전의 세계 경제에서 중국, 인도가 차지했던 지위를 회복하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김상준은 현재의 세계사적 대변화에 대해 ‘대파국인가 대전환인가’라는 견해 차이가 있다며, 중국과 인도, 한국과 동남아의 여러 국가 등의 성장은 격차를 확대하고 그것을 이용해 침략, 식민 등 타자에 대한 지배를 발판으로 한 서구의 팽창 근대화와는 달리, 평화적이고 내적 힘이 성장한 내장 근대화라며 ‘팽창근대’에서 ‘내장근대’가 전 지구화하는 대전환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본다.(주: 김상준, 2021. 특히 pp. 701-739.)  김상준의 견해는 서구 중심의 세계관, 역사관에 젖어서 자학하거나 서구를 따라잡는 것이 목표이자 과제인 것으로 인식해 온 지금까지의 지배적 생각에 대해 자성하게 한다. 그리고 각 국가 및 국제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다만, 중국, 인도 등이 개혁개방 정책 채택으로 세계 시장체제에 적극 동참한 이후 지금까지 팽창이 아닌 내장의 방식을 택해서 성공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시진핑 주석과 모디 총리의 집권 이후 보이는 민족주의와 권위주의의 결합이 ‘팽창’의 모습을 띠거나 그렇게 비침에 따른 갈등의 확대에 대해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오늘날의 세계질서 혹은 국제질서에 대해 ‘무정부적 전국시대와 달리 전쟁을 자기규제하고 상호규제하는 힘이 커진 후기근대의 다극주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다극주의 시대가 도래했느냐, 혹은 일극체제가 아닌 다극체제가 곧 형성될 것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이 든다. 중국은 총 GDP는 곧 미국을 추월하고, 군사력의 경우 격차가 워낙 커 시간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경제력에 비례해 대등해지는 등 하드 파워는 어느 정도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사회 다수가 공감하고 따를 수 있는 가치나 규범, 매력을 만들고 수용하게 하는 소프트파워는 아직 현저히 부족하다. 이런 중국의 한계는 코로나19 사태의 발생과 확산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중국은 개발도상국이나 이탈리아, 브라질 등 피해가 큰 상당수 국가에 대해 백신 등 의료 물품, 인력 지원에 나서는 등 적극적 외교를 전개했다. 하지만, 사태 초기 보여준 정보의 통제와 은폐 등 권위주의적 정책, 국제사회에 대한 투명하고 신속·정확한 정보의 미공유와 책임을 둘러싼 공격적 논쟁(후자는 논쟁의 한쪽 당사자인 미국의 탓도 큼), 자국과 자국인에 대한 서구의 차별을 탓하면서도 국내에서 아프리카인에 대해 벌인 차별적 행동, 이른바 ‘전랑(戰狼) 외교’로 상징되는 무례하고 국가주의적인 행태 등으로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공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주: 2020년 5월 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4월 초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등 중국 최고 지도부에 전달된, 중국 국가안전부 산하 싱크탱크인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CICIR)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코로나19 사태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 정서 확산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중국에 대한 정서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최악의 상황이고, 양국의 무력충돌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다. 국민일보, “中 내부 보고서 "전 세계 반중 정서 최악.. 미중 무력충돌 대비해야", 2020.05.06일 자에서 재인용. 코로나19와 중국의 대응, 이런 중국에 대한 국제여론의 반응 등에 대한 본문과 각주는 졸고, 2020, “코로나19와 세계질서, 우리의 대응,” 『정의와 대안』 2020년 5월호, 정의정책연구소. 중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현재 중국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인류운명공동체, 인류에 대한 중국의 기여 등을 내세우며 반패권주의, 반미주의, 반자유주의 등 가치와 규범 차원에서도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인류 공동의 보편적·적극적 대안의 가치라기보다는 중국 중심적, 민족주의적인 소극적 저항가치로서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주: 김태환, 2021, 「미·중 가치 경쟁과 백신외교」 IFANS 주요국제문제분석 2021-22,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이데올로기 등의 측면에서 중국은 과거 구소련이 사회주의진영에서 가지고 있던 리더십에 버금가는 비자유민주체제 리더십도 아직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힌두민족주의가 득세하는 인도도 한때 비동맹체제를 주도했던 보편적 가치 주창자로서의 리더십, 대안체제로서의 매력은 거의 상실했다.
  국제질서를 “특정 시점에 존재하는 국제사회의 구조와 형태를 구성하는 힘의 배분 또는 규범, 절차, 제도의 총체”로서 정의할 때, 국제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규범을 포함한 집단적 믿음은 물질적 힘과 더불어 안정적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주: 이러한 국제질서 및 사회문화적 토대로서의 가치와 규범의 의의 등에 대해서는 김태환, 2021.; 김태환, 2019, 「국제 규범질서 변화의 관점에서 본 미중 경쟁과 한국 외교에 대한 함의」 IFANS 주요국제문제분석 2019-27,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등을 참조.) 그런데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탈냉전 이후 일극체제로 인식되던 미국의 물질적 힘은 물론, 전후 미국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던 가치·규범 면에서도 일방적 팽창주의에 따른 자유주의의 부식,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부작용과 그에 따른 반발, 국제기구의 정통성·효용성에 대한 회의와 미국(특히 공화당과 그 행정부)의 무시 등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 인도 등의 한계에서 보듯 그것을 대체하는 다극적 질서가 형성되지는 못한 상황, 특히 가치·규범 면에서의 기존 강대국들의 리더십 상실 혹은 기대 난망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주: 유라시아그룹 대표인 브레머(Ian Bremmer)는 국제관계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국가나 국가들의 연합이 존재하지 않는 리더십의 부재라는 의미로 오늘날의 세상을 G-Zero(G-0)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수형, 2020, 「‘G-Zero’ 시대의 도래와 한국의 대응전략 모색」,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재인용.) 기존의 질서는 흔들리는데 새로운 질서는 구축되지 않는 과도기적 국제질서인 것이다. 
  이런 국제질서에 대해 미국과 중국 간의 경쟁 등 물질적 힘의 관점에만 주목하면 한국의 선택은 ▲균형, ▲편승, ▲헤징(위험분산) 등의 옵션에 한정되지만, 가치·규범 등도 포함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한국의 정체성과 규범에 근거해 대안적 외교·안보 정책을 전개할 수 있다.(김태환, 2019, 특히 pp. 24-32.를 참조 바람.) 그런데 아직은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주체적이고 대안적인 접근과 그 실행 부재의 문제는 지금 당장에 국한하지 않는다. 문제와 그 원인,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좀 더 긴 시간적 안목을 갖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3. 탈냉전 이후 한국 정부 정책의 한계, 문제점

  냉전기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은 미국에 의존, 추종하는 데 불과했다. 자주성이 크게 제한되고 위신이 손상되는 것은 물론, 체제 대결을 앞세우다 보니 독재를 합리화하고, 전쟁만 발생하지 않는 ‘소극적 평화’에 만족해야 하는 등 부작용이 심했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이 쇠퇴하기 이전이어서 국가의 생존과 성장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주: 중국 등은 패권과 패권국에 대해 ‘권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행태’로서 미국, 구소련 등을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반면 패권안정이론에서는 패권국을 ‘자국 중심의 안정적 국제질서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를 바탕으로 공공재를 제공하는 국가’로 규정한다. 지배를 부정하지 않지만, 공공재를 제공하는 리더십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패권안정이론에서도 쇠퇴하는 패권국은 패권 유지를 위해 타국에게 부담을 전가하고 자원을 추출하는 악의적·추출적 패권이 된다고 한다. Robert Gilpin, 1981, War and Change in World Politic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 김관옥, 2017,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대외정책,” 『국제정치연구』 제20집 1호.) 탈냉전 초기 북방정책을 전개해 외교·안보적 이익은 물론 중국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탈냉전기 미국 일극 패권체제 아래에서 세계화를 명분으로 한 신자유주의 질서의 전면화, 이라크전 등 미국의 군사력을 앞세운 신보수주의(‘자유주의 패권주의’는 정치기반만 다를 뿐 같은 수레의 다른 바퀴)적 행태나 전략적 유연성을 앞세운 주한미군 재배치-한미동맹 역할 변경도 그대로 따랐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로 경제 분야에서 미국 패권의 균열이 보이고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에 의해 패권의 실종, 기존 국제질서의 균열 등이 가시화된 이후에도 그에 대응하는 뚜렷한 외교적 행보나 국가적 차원의 대안을 만들고 적용하기 위한 노력은 별로 없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K-방역이 국제적 평가를 받자 국제질서 선도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동조 세력을 만들어내는 등 변화의 구현을 위한 입체적 정책, 꾸준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주: 국책연구원이나 대통령 자문 정책위원들의 모색과 그 학문적 결과들은 다음과 같이 있었다. 김태환, 2021. ; 전봉근, 2020, 「코로나19 팬데믹의 국제정치와 한국외교 방향」,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 이남주, 2020, 「뉴노멀 시대, 정치외교의 변화」, 대통령 정책기획위원회, 『문재인 정부 3주년 국정토론회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위기와 기회』 자료집. ; 박병광, 2020,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질서 변화와 우리의 대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등. 그런 노력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부 정책으로 그것이 반영되어 실제 집행되고 꾸준히 실천되고 있느냐, 그것을 위해 제대로 리더십이 발휘되었느냐 하는 점에서 이 정부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주변 지역 질서에 대해서는 탈냉전 이후, 특히 외환위기와 6자회담 등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 지역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는 구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자, 중국과는 (사드 외에도) 동북공정 등 역사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경제와 안보에도 그런 갈등이 비화되었다. 일본, 중국 등 주변국 관계가 원만하지 않거나 악화함에 따라 지역 공동체 가시화는커녕 협력의 기운마저 크게 쇠퇴했다. 
  한반도 차원에서는 북방정책과 7·7선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등 대북 화해·협력정책에도 불구하고 적대 정책의 관성을 버리지 못하거나 강경파의 준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탈냉전에 따른 한반도 정전·분단 체제 청산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북핵 문제가 대두·심화되었으며, 수십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비핵화의 가능성도 좁아졌다. 이런 적대 정책의 관성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에 두드러졌다. 북한붕괴-흡수통일을 염두에 두다 보니 남북관계도 최악이었으며, 선 비핵화의 경직된 정책으로 북의 핵 능력 증강 드라이브에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전쟁 위기도 고조되는 안보 무능을 보였다.
  문재인 정부에서 햇볕·평화번영정책 2.0을 주장하며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며 운전자를 자임했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 즉 북미관계가 악화하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관계도 2019년 이후 일체의 대화가 끊기며, 남의 군비증강에 대해 북이 날 선 비판을 하다 자신들도 전면적 군비증강 정책을 실시하는 등 군비증강 대결을 일삼는 상황이다. 현 정부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재개를 주장하면서도 군비증강은 지속하고, 북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데도 대북제재를 우회할 정도의 남북 교류협력 재개와 임기 내 실현이 어려운 ‘종전선언’을 거듭 제안하는 등 기존 정책에 머물러 있다. ‘튼튼한 안보가 남북대화를 뒷받침한다’는 햇볕·평화번영정책의 기본 인식과 정책이 이미 현실과 충돌하고 있는데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며 수정할 기미가 안 보인다.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 햇볕·평화번영정책이 시행되던 시기를 돌이키면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보인다. 첫째, 북의 비핵화를 우선하느라 평화협정 체결 등 평화체제 전환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으며, 동북아 안보(평화)협력 추진은 구두선에 그쳤다. 둘째, 외교는 균형자론과 한미동맹 강화론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셋째, 남북관계 개선 대 강력한 안보-한미동맹을 앞세우는 정부 부처 간, 주요 인사 간 정책의 엇박자를 보인다.


4. 기존 외교·안보 정책 한계의 원인 진단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미국이 국제질서를 주도한다며 그것을 추종하거나, 반대의 경우 대안 없는 반미에 머물렀다. 최근 국력이 성장하며 ‘중견국’을 자임하지만, 그에 걸맞은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감, 국제질서에 대한 나름의 인식과 대안을 정립하고, 구체적이고 일관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현재의 요동치는 국제질서(혹은 세계질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립시킬 책임의식은커녕, 변환기에 국익(국가공동체 다수의 이익)을 지키고 확대할 방안을 모색·실천하는 자주 의식마저 희박하다. 심지어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지 정립도 않고 그저 한미동맹을 신화화하며 미국을 추종하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약소국(민)’이라는 콤플렉스, 자기비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주변 지역 질서가 EU를 형성한 유럽이나 아세안으로 뭉친 동남아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갈등이 고조되고 있기는 하다. 두 지역의 경우 협력의 제도화를 이뤄내고 적어도 역내국가 간에는 전쟁을 생각할 수 없다. 반면, 동북아는 갈등이 만연하다. 하지만 상황 탓이나 다른 나라 핑계만 댈 수는 없다. 탈냉전 이후 역대 정부는 대안적 지역 질서가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막상 지역 정책은 그 범위와 대상 자체가 동북아, 동아시아, 신아시아 등으로 일관되지 못했고, 실천보다는 구상 정도에 머물렀다. 정책을 실행하는 때도 주변국의 동의와 참여를 끌어내며 강대국의 이해와 충돌을 조정·돌파해내는 등 적극적이고 치밀한 전개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전 정부의 행동으로 인한 중국과의 관계 악화가 크게 회복되지 못했고, 일본과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후자의 경우 전후 샌프란시스코 체제(그 연장선인 65년 한일기본조약체제)의 기득권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일본의 소아적 태도도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한반도평화프로세스’ 구상과 주변국 관계 포함 지역 정책이 제대로 연계되지 않고 분절적-단계적으로 접근한 문 정부의 인식과 접근법 탓도 간과할 수 없다.
  대북 정책 혹은 한반도 정책의 경우, 보수 정부와 민주당 정부 정책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민주당 정부는 역대 대통령이 ‘우리의 목표는 우리식 체제로의 흡수통일이 아닌, 평화적·상호호혜적 관계를 형성하고 북 스스로 관련 정책을 변화할 수 있는 조건 형성’이라고 말했고, 정책도 이런 기조를 가지고 전개했다. 하지만, 헌법의 영토조항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의 통일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 그대로 살아있는 등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평화공존의 원칙 실현은 부재했다. 이런 연유로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북은 접근법만 다른 것으로 인식하고 초기에 강력히 반발했고, 지금도 불신은 내재해 있다. 

  민주당 정부 정책의 한계를 이론적으로 보자면, 첫째, ‘경제에서 안보로, 한반도에서 동북아로’라는 기능주의적·단계적 접근법 자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가 빠진 안보도 불가능하지만, 경제로 안보를 살 수는 없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2019년 이후 두드러진 문제인 한국의 입지와 역할 제한의 원인이 된 평화프로세스의 난항, 대북제재가 강력히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경협과 교류협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과거의 관성적 정책을 재연한 것들이 다 여기에 기인한다. 
  둘째, 협력과 그 확산을 방법론으로 하고 있지만, ‘튼튼한 안보가 대화의 뒷받침이 된다’는 자유주의적 접근법의 전제가 가진 문제이다. 보수 정부도 마찬가지지만 민주당 정부 역시 대북정책을 포괄하는 안보정책이 힘에 의한 억지,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국가안보를 우선하는 고답적인 안보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 평화’, ‘인간안보’ 등을 언급했지만, 레토릭 혹은 구두선에 불과) 불신과 갈등, 강대국 의존,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위기는 지속되거나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국방과 북한은 물론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 대비를 내세우며 군비증강에 매진했다. 그로 인해 북의 반발은 물론 일본의 ‘GDP 1%에서 2%로’ 군비증강 선언과 중국의 경계와 의구심 확대를 낳는 등 ‘안보딜레마’를 키우고, 대북정책-외교정책과도 모순을 낳고 있다. 
  정체성, 가치 등 인식을 강조하는 구성주의로 해석하자면, 헌법 5조 등에서 ‘평화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쟁의 경험과 정전체제에 짓눌려 ‘군사안보국가’의 정체성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진정 평화국가의 정체성·가치를 지향한다면, 평화가 무엇이고, 어떻게 확보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현실주의, 자유주의 등 기존 주류 국제정치이론의 인식과 그에 입각한 정책에 대한 발본적 성찰과 대전환이 필요하다.

 [표 1] 국제정치이론별 평화에 대한 인식과 정책

이론 평화 인식(목표) 정책
현실주의 전쟁 부재-소극적 평화 군비증강, 동맹강화(세력균형): 절대적 국가안보 추구, 군사안보 중시
자유주의 협력, 그 확산 전제: 국제질서 안정, 국가안보 교류·경협에서 정치·군사협력으로 발전(기능주의)
평화로운 국제체제 평화의 기구화, 제도화(제도주의)
신보수주의 위협 소멸-체제 완전 통일 체제 붕괴, 흡수통일
비판적 국제이론(평화학) 구조적 폭력 부재-적극적 평화 인간안보·공동안보 추구, 대안적 체제 형성



5. 대안: 중견·평화 국가의 적극적·포괄적 평화·외교 정책 

  한국은 경제력은 세계 12위, (핵전력 제외) 군사력은 세계 6위권이며 종합국력 면에서 세계 10위권의 작지만 강한 국가이다.(주: 미국 US뉴스에 따르면 글로벌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기업 VMLY&R의 계열사인 BAV 그룹과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은 리더 역량, 경제·정치적 영향력, 외교 정책, 군사력 등 5가지 요소의 평균을 산정, 2021년 전 세계 국력 순위를 매겼는데, 한국은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프랑스에 이어 8위였다. 머니S, “한국 국력 전 세계 8위 ~”에서 재인용. https://moneys.mt.co.kr/news/mwView.php?no=2021062209248053885 (2021.11.11. 검색).) 비록 주변에 세계 4대 강국이 몰려있지만, 구한말처럼 국권 상실을 우려할 정도의 약소국도 아니고, 제국주의 시대도 아니다. 다만, 남북이 분단된 데다 정전체제를 청산하지 못해 평화가 취약하고 강대국이 간섭·개입할 여지가 크다. 우리와 후손들이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안보’, 전쟁은 물론 구조적 폭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적극적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국제질서에 책임성을 갖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중견국가’(단순히 물질적 힘에서 강대국도 약소국도 아닌 중간 정도의 하드 파워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국제사회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가치에 기반해 그런 국제질서가 구축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국가), 평화를 만들어가고 구조화하는 ‘평화국가’로서의 정체성과 ‘평화·공생’의 가치에 근거하여 그것을 한반도와 주변 지역, 국제질서의 규범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적극적·포괄적(다차원적, 통합적) 평화·외교 정책을 전개해야 한다. 
  첫째, 기존 국제질서의 전환기에 위기가 아닌 기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능동적·적극적 외교·안보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한국 국익에 입각한 외교·안보 정책 전개는 너무나 당연한 바이며, 무엇이 우리 국익인지 정립해야 한다. 한국의 국익이자 국제사회 질서 유지와 새로운 정립의 대원칙은 다름 아닌 ‘평화와 공생, 삶(혹은 문명)의 지속가능성’일 것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 강압이 아닌 존중은 최소한의 원칙이며,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에 ‘무정부주의적 국제질서를 명분으로 한 힘을 앞세운 자국 우선주의가 아닌 국제사회 공동의 이익을 위한 협력’의 원칙 존중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대원칙이 실현되는 국제질서를 실제로 만들어가기 위해 강대국들도 이런 요구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물질적 힘의 구축이 필요하다. 한국 독자적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우리와 대원칙을 공유하는 다자주의 연합으로서 ‘(가칭)평화·공생·기후 국제연대회의’를 형성하는 등 적극적 중견국 외교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질서 재편에서 생존을 유지하고 평화를 공고화할 수 있는 다차원의 정책 전개가 필요하다. 최소한, 미(일)-중(러) 등 강대국 간 전략적 경쟁 심화 상황에서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만해협 등에서의 분쟁에 휩쓸리는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 보다 능동적으로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갈등을 안보-경제 등 포괄적 이익이 조화되는 협력으로 뒤덮는 평화·가교국가 정책이 필요하다. 냉전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전범의 멍에를 쓴 서독이 동방정책 등을 통해 유럽의 평화와 통합, 통독을 이뤄냈는데, 우리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셋째, 안보정책 역시 인류의 고뇌와 희망이 응축된 전향적 안보관에 입각해 전환해야 한다. 강력한 국가안보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구태의연한 안보관으로 인한 ‘안보 딜레마’, 구성원들의 안전과 평화 침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의 안보에 대한 우려 인정과 협력강화로 모두의 안보를 이룰 수 있는 ‘공동안보’,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다차원적 안전을 목표로 한 ‘포괄안보’, ‘인간안보’로 전환해야 한다.
  넷째, 국제질서 전환기에 우리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고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한반도 평화의 안정화, 구조화가 필수이다. 북미 관계에 목을 매는 수동적 정책에서 벗어나 한반도 문제의 주도자는 바로 우리 자신임을 확고히 견지하며, 그것을 구조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과정과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원칙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정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 비핵화-평화체제 달성을 위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재개는 물론 지난 과정의 한계를 극복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동결에서 시작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단계적 현실화, 남·북·미·중 4자 평화선언(종전선언)으로 출발하는 평화협정 체결 등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논의할 4자회담, ‘동아시아판 헬싱키프로세스’를 통한 동아시아평화공동체의 기반 형성을 위한 6자회담 등을 다차원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둘째, 평화를 담보하고 만들어가기 위해 대대적 국방개혁과 함께, 군비경쟁 중단과 상호군축 선도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군은 무기는 대대적으로 확충하면서도 고급간부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우선해 비인권, 비민주 군대에 머물러 국민적 신뢰에 기반한 강한 군대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 민간인 출신(전역 후 10년 이상 경과) 국방장관 주도의 대대적 국방개혁이 필요하다.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 때문에라도 유지할 수 없는 현재의 대병력과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현역징집률 90% 이상의 무리하고 경직된 징병제를 간부 15만 명, 병사 15만 명인 30만 명의 작지만 강한 군대, ‘한국형모병제(징·모혼합제)’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의 소모적이고 악순환을 불러일으키는 군비경쟁을 중단하고, 남북군사분야합의를 전면적으로 이행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군비통제와 상호군축방안을 협의해나가야 한다. 특히 북한의 총 GDP(2020년 약 35조원)를 훨씬 웃도는 남한의 과도한 국방비(2020년 약 50조원)를 ‘방어 충분성’에 입각한 적정 수준의 군비로 조정함으로써 선순환을 선도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적극적·포괄적 평화·외교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데 있어 우리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점점 강화하기 위해서도 ‘사이 좋은 이웃’ 실현을 목표로 남북관계 혹은 대북 정책의 일대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 위 둘째에서 이야기한 남북 군비증강 대결을 군비동결과 상호군축 선도를 통해 전변시키는 것과 함께, 남북 적대적 대결체제 청산과 평화공존 실현을 최우선 과제로 흡수통일 배제-상호체제 인정과 협력을 대전제로 한 남북기본협정 체결과 국회 비준 동의, 헌법의 영토조항 폐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조항의 ‘기존 남북합의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로 개정, 남북 교류협력의 안정성과 소수의 대박이 아닌 청년, 노동자 등 다수의 이익 보장 등을 위한 남북사회경제협력강화협정 체결, 기후위기 시대 ‘한반도 그린뉴딜’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외교·국방·남북관계 정책을 유기적·통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국방부, 외교부, 통일부가 따로 놀고 주요 정책이 충돌하는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이런 원칙을 구현하기 위한 조직적 대안으로서 통일부를 평화부(혹은 남북관계부)로 개칭하고, 그 장관이 평화부총리이자 NSC 상임부의장으로 청와대 안보실, 국방부, 외교부, 평화부(혹은 남북관계부)를 통합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하나의 안일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이원집정부제를 만들고, 내정은 수상이 외교·안보·남북관계는 대통령이 책임을 지는 행태로 만들 필요가 있다. 개헌 이전의 과도기에는 자신의 심복이자 권력의 실세를 평화부총리로 임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평화·공생을 선도하는 중견·평화 국가의 적극적·포괄적 평화·외교 정책을 요약하자면 다음 그림과 같다.

[그림 2] 적극적·포괄적 평화·외교 정책 개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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