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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아닌 것으로 돌변하다

6공화국 한국 정치,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
  • 입력 2021.12.22 11:30      조회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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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한국 대선과 비슷한 시기에 실시되는 프랑스 대선 상황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작금 프랑스 정치도 우리 못지않게 병이 중하다 진단했다.

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러고 보면 문제는 단지 헌법상의 권력구조만은 아니다.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이원집정부제이지만, 마크롱 정부나 문재인 정부나 오십보백보니 말이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정치의 문제를 '제왕적 대통령제'라 진단하고는 곧장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처방하는 접근법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처방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이들처럼 양대 정당 중 한 쪽에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놀음으로 분석을 대신할 수도 없다. '파시즘'은 가장 느슨한 의미에서도 민주주의의 테두리에 담길 수 없는 그 적인데, 제6공화국 민주주의가 아무리 중병에 걸렸어도 아직 그쯤은 아니다. 돌팔이 의사의 호들갑에 장난 맞추다 보면 정작 진짜 무거운 병의 싹을 제대로 잘라내지 못하는 법이다.

제6공화국 정치를 제대로 극복하려면, 아무래도 이런 일면적 접근법이나 저질 선동과는 다른 분석이 있어야 하겠다. 혹시 사회과학 고전들 가운데에 이런 분석의 도구로 쓰일만한 개념이 있지는 않을까? 실은 한국 민주주의 상황을 하필 프랑스와 견주어서인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것은 보나파르트주의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아닌 것으로 돌변하다 – 보나파르트주의

'보나파르트'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말한다. 단, 여기에서 나폴레옹이란 위인전에 나오는 그 나폴레옹이 아니라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다. 나폴레옹 3세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들어선 민주공화국, 즉 프랑스 제2공화국에서 남성 보통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임기가 끝날 무렵인 1851년 말에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 임기를 마음대로 연장하고는 다시 몇 달 뒤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삼촌이 간 길을 그대로 반복한 셈이고, 한국인에게는 박정희를 연상시키는 행보다.

아무튼 1789년 대혁명을 이어받고 여기에 새로운 사회주의-노동계급 요소들까지 더한 찬란한 혁명으로 출범한 민주공화국은 불과 4년만에 민주주의 아닌 어떤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 한 이가 카를 마르크스다. 그는 "프랑스의 계급투쟁"(1850년)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년)이라는 두 장편 논설을 통해, 2월 혁명에서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 수립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했다. 두 글에서 마르크스는 다름 아닌 제2공화국 민주주의 자체가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고 독재 체제를 낳았다고 냉정하게 진단한다.

어떤 과정이었는가? 이 짧은 지면에서 당시 프랑스 역사나 마르크스의 논설을 상세히 짚을 수는 없다. 다만 제2제정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마르크스가 주목한 요소들만 나열해보면, 우선 민주혁명에 함께 한 사회 세력 가운데 노동계급, 더 정확히 말하면 실직 상태에 있던 하층 노동자들이 혁명 직후에 첫 번째로 타격을 입었다. 1848년 6월에 임시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노동자 봉기가 유혈 진압된 뒤에 그나마 민중 안의 가장 투쟁적인 부분과 국가기구를 연결하던 고리가 끊어져 버렸다.

이 봉기 뒤에도 의회 안에서 급진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성향의 민중 대표들이 활동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은 급속히 고립됐다. 반면에 의회를 좌우하기 시작한 것은 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라는 왕당파의 두 분파와 부르주아 공화파였다. 이들은 민중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철저히 소수 기득권 집단들만을 위해 이전투구를 벌였다. 이런 와중에 새 헌법에 도입된 미국식 대통령제에 따라 대선이 실시됐고, 이 선거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주로 농민의 지지를 받으며 승리했다.

그 다음부터는 대통령과 의회가 정쟁의 두 주역이 됐다. 새 대통령은 프랑스의 거대한 중앙집권적 국가기구를 장악하고는 그 힘으로 의회를 압박했다. 의회 다수파는 새삼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대통령에 맞섰지만, 의회 밖에서는 아무도 이들의 외침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민중은 왕당파와 부르주아 공화파가 벌이는 그들만의 싸움에 신물이 나 있었으며, 심지어는 부르주아계급 자신도 자기 계급의 의회 정파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지루하게 지속되다 결국 대통령 쪽에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이로써 2월 혁명으로 시작된 모처럼의 민주공화국이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민사회와 단절된 의회는 모두의 경멸 속에 고독사하고 말았다.

반면에 독재자로 부상한 대통령에게는 권력이 집중되었다. 어느 계급에도 직접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모든 계급의 기대와 환상, 체념이 모였고, 그럴수록 그는 더 큰 권력의 장악과 전횡으로 이에 답했다. 이때부터 사회과학자들은 시민사회 안의 어떤 계급도 확고하게 정치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권력이 1인 통치자에게 집중되는 양상을 '보나파르트주의'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요약한다.

"프랑스가 한 계급의 전제에서 벗어난 것은 이처럼 오로지 한 개인의 전제 아래로, 그것도 권위 없는 한 개인의 권위 아래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이리하여 투쟁은 모든 계급들이 다 같이 힘없이, 다 같이 말없이 총부리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해결된 듯이 보인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2004. 380쪽)

결국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앞섰던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하며 소멸했다.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진압함으로써 이와 격리된 정치 공간,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부분과 괴리된 의회 안에서 끝없이 이어진 기득권 정파들만의 정쟁, 이런 의회를 중앙집권적 국가기구와 대립시키고 마침내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역할을 한 미국식 대통령제, 갈등의 민주주의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대통령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며 그에게 무릎 꿇은 사회 내 모든 세력 ... 이것이 마르크스가 정리한 민주주의 자멸 과정의 주된 계기들이었다.

미국식 대통령제는 '연성' 보나파르트주의

여기까지 읽고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초창기라 할 시점에 벌어진 일들이 21세기 현실과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더구나 대한민국 제6공화국 민주주의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한데 보나파르트주의는 의외로 '현대' 정치를 분석하는 틀로 아직도 활용되고 있다. 최근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도메니코 로수르도(Domenico Losurdo, 1941-2018)의 작업이다. 로수르도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현대 이탈리아 사상가다. 오랫동안 공산당 당원이었고, 평생 고집스러운 좌파였다. 그는 정치철학과 역사학을 넘나들며 여러 저작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 보통선거제의 승리와 쇠퇴(Democrazia o bonapartismo. Trionfo e decadenza del suffragio universale)>(1993년)다.

로수르도는 이 책에서 보나파르트주의 개념을 19세기 중반 프랑스를 넘어 다른 나라에 확대 적용한다. 그 나라는 무려 미국이다! 어쩌면 보나파르트주의는 미국식 대통령제가 당시만 해도 소농사회였던 미국이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모순이 이미 첨예해진 프랑스 같은 곳에서 실시됐을 때에 나타나는 뜻하지 않은 효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로수르도는 이런 생각을 뒤집는다. 그는 미국 정치 자체를 보나파르트주의의 틀로 분석한다.

로수르도에 따르면,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가 대두하며 미국에 자리 잡은 정치 체제는 보나파르트주의의 한 변형이다. 이 시점에 미국식 대통령제는 미국 안에서도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아닌 것의 경계선에 선 체제로 변질하고 말았다. 의회는 단순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를 통해 민주당과 공화당, 두 당이 독점하며, 따라서 시민사회 내 기층 세력과 구조적으로 단절된다. 대중에게 남은 것이란 양대 정당이 내세우는 두 명의 정치인 중 한 쪽을 뽑는 대선 과정이 거의 전부다. 그리고 이렇게 뽑힌 연방정부 대통령은 '국민/인민(people)'의 이름으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보장한다. 로수르도는 이 체제를 '연성(soft)' 보나파르트주의라 규정했다.

흥미로운 논의다. 연성 보나파르트주의 개념을 현재 한국 정치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쉽게도 로수르도의 연성 보나파르트주의론에 관한 소개는 여기까지다. 당장은 더 나아가기 힘들다. <민주주의인가, 보나파르트주의인가>의 영어본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올해 가을에 영어권에 처음 소개될 예정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간이 미뤄졌다.

하지만 굳이 로수르도의 이론에 기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충분히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보나파르트주의 분석을 한국 현실에 적용해볼 수 있다. 가령 마르크스가 분석한 19세기 프랑스 보나파르트주의 성립 과정의 중요한 요소들은 당대의 맥락을 넘어 다른 시공간에 맞게 '일반화'될 수 있다. 그럼 최소한 다음의 요소들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회운동의 억압 혹은 사회운동이 정치 공간에 진입할 통로의 제한. 시민사회의 적극적 부분인 사회운동들의 성장을 원천 봉쇄하거나, 협소한 정당정치 지형과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통해 사회운동들이 정치 공간에 유기적인 영향력을 끼칠 통로를 차단한다. 이에 따라 민중의 커다란 부분이 제도정치와 구조적으로 괴리된다.

둘째, 제한된 원내 정당 간의 일상적 정쟁. 대개 두 정당으로 수렴되는 제한된 원내 정당들이 벌이는 끊임없는 정쟁이 '정치'의 모든 것으로 여겨진다. 원내 정당들은 모두 '대중'정당을 표방하지만 의회에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실상 담합한다. '정치'는 시민에게서 완전히 소외된다.

셋째, 행정적 국가기구의 끝없는 확장.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관료제에 바탕을 둔 국가기구는 꾸준히, 돌이킬 수 없이 확장돼나간다. 다른 개입이 없다면, 이 경향은 대의민주제의 역량을 압도하며 이를 무력화시킨다. 어떤 국가에는 이 경향에 맞서 일정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지방자치나 연방제의 전통이 잔존하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나라(한국)도 있다.

넷째, 대통령제. 정치에서 소외된 대중의 민주주의 열망은 오직 대통령 선출 과정과, 대통령 1인을 향한 기대(혹은 적대)로 표출되며, 체제는 이를 오히려 활용한다. 선거를 포함한 현존 민주주의 장치에 대한 대중의 환멸은 대통령 1인에 권력이 집중되길 바라거나 이를 당연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대통령 권력이란 실제로는 국가 관료기구의 인격적 대변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일반화된 보나파르트주의다. 이는 각 나라의 독특한 정치 제도들을 통해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또한 '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현재의 프랑스 제5공화국과 대한민국 제6공화국 모두 일반화-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 체제라고 본다. 달리 말하면, 지금 우리에게 문제는 단순한 '제왕적 대통령제'나 '포퓰리즘' 혹은 '파시즘' 같은 오진이 아니라 제6공화국의 일반화-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 체제다.

대한민국의 현 정치 체제는 일반화-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

이런 진단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세대의 위대한 성취로 기억되는 '제6공화국 민주주의'가 민주주의가 아닐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화-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는, 가장 좋게 말해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아닌 것의 경계선에 선 체제다. 이는 당장은 결코 파시즘이 아니지만 파시즘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있는, 가장 취약한 유사-민주주의 체제다.

이 진단이 전하는 또 다른 중대한 메시지는 '제6공화국을 넘어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다. 그것은 단순히 권력구조 개헌일 수 없다. 물론 대통령제는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회운동이 부흥해야 하며, 선거제도 개혁과 정당정치 지형 재편이 필요하다. 국가기구의 경우는 최상위 권력구조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지방정부의 관계, 관료기구와 대의제의 균형, 대중의 참여 통로와 수준 또한 변화해야 한다.

또한 일반화-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라는 진단은 미래 전망에서도 쓸모가 있다. 지금 대선은 양대 정당이 각각 내세운 이재명, 윤석열, 두 후보를 향한 기대 혹은 적대라는 정념으로 일렁인다. 이른바 '분석'들도 이 정념의 정제된 표현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미래 시나리오는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모든 기대를 빨아들여 5년간의 정책 사보타주로 이에 답하며 기존 체제의 수명을 5년 더 연장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는 '차가운' 보나파르트주의(그 최근 사례는 물론 문재인 정부다). 아니면 대통령에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그 권력을 실제로 사용하여 '독재'와 '파시즘'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하는 '뜨거운' 보나파르트주의. 이재명이든 윤석열이든 이 두 시나리오를 넘어설 수 없으며, 두 위험 다 두 사람이 아닌 일반화-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의 소산이다.

다른 미래는 오직 다른 쪽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 그것은 제6공화국 30년 동안 한 번도 본격적으로 추진돼본 적 없는, 일반화-제도화된 보나파르트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다. 민중의 거대한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운동들의 재생과 정치 체제 변혁의 동시 추진만이 이에 걸맞는 강력한 일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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