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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보장제

[장석준 칼럼] 기본소득에서 일자리 보장으로 '전향(?)'한 이유

'일자리 보장제'가 다음 대선에서 '국가의 제 1목표'가 돼야 한다
  • 입력 2021.06.22 11:00      조회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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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본소득이니 안심소득이니 논쟁이 한창이다. 논쟁 주역도 일부 학자나 논객이 아니고, 무려 주요 대선 주자들이다. 이쯤 되면 내년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기본소득이 차기 정부 정책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해 보인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처음 소개되고 논의되기 시작할 때부터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대략 2008년 금융위기 무렵부터는 기본소득이 미래 대안의 필수 요소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이 때문에 비판도 꽤 받았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막상 '잘 나가는' 쟁점이 된 지금, 나는 기본소득보다는 다른 정책 대안이 지금 한국 사회에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흔히 '일자리 보장제'('고용보장제'라 옮길 수도 있다)라 불리는 구상이다. 말하자면 기본소득에서 일자리 보장으로 '전향'한 것이다.

일자리 보장제 - '완전고용'을 국가의 제1목표로

일자리 보장제 역시 최근 활발히 소개되고 있다. 현대통화이론(MMT)을 주창하는 학자들의 책(L. 랜덜 레이,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화폐의 비밀과 현대화폐이론>, 홍기빈 옮김, 책담, 2017; 스테파니 켈튼, <적자의 본질: 재정 적자를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이가영 옮김, 비즈니스맵, 2021; 전용복,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위한 경제학>, 진인진, 2020)에서 이 구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접할 수 있으며, 정당들 가운데에는 정의당이 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일자리 보장제를 상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논의를 위해 몇 가지 핵심 내용만 풀어보면 이렇다. 이 구상의 가장 밑바탕에 깔린 내용은 '완전고용'을 정부가 당장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의무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완전고용은 비록 립 서비스 수준일지라도 주요 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곤 했다. 그러나 일자리 보장제가 목표로 삼는 완전고용은 이런 기존 관행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첫째, 과거에는 '완전고용'을 말하더라도 이것이 실업이 전혀 없는 상황을 뜻하지는 않았다. '자연실업률' 등의 이름으로 실업의 일정한 존재를 당연시했고, 그에 근접하기만 하면 '완전고용'이라 불렀다. 그러나 일자리 보장제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자리 보장제에서 완전고용이란 실제로 비자발적 실업이 0인 상황을 뜻한다. 즉, 자기 뜻에 반한 실업자가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

둘째, 일자리 보장제에서는 완전고용이 정부 경제사회정책의 여러 목표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라 다른 목표들을 규정하는 최고 목표가 된다. 그 위상은 마치 한국은행이 모든 결정의 중심에 놓는 '물가 안정'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일자리 보장제가 실시될 경우에 경제사회정책을 집행하는 모든 국가기구(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는 완전고용을 책임지는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20세기 복지국가에서도 일자리 보장제와 유사한 메커니즘이 작동한 바 있지만, 일자리 보장제는 그 수준조차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최전성기에 복지국가들은 불황이 닥치면 주로 사회 서비스 분야를 중심으로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려 완전고용을 추구했다. 일자리 보장제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겠다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20세기 복지국가에서 이것이 정부-여당의 성향과 의지에 따라 임의로 추진된 데 반해 일자리 보장제는 이를 경제사회정책 담당 국가기구의 의무로 못 박자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른 일자리 보장제의 작동 방식은 복잡할 게 없다. 일하길 원하지만 민간 고용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모든 사람을 국가가 '고용'한다. 과거 복지국가처럼 공공부문 일자리를 만들어 구직자를 채용하는 게 아니라 일단 무조건 국가가 고용한 뒤에 알맞은 일자리를 마련한다. 이때 일자리 보장 프로그램을 통해 국가에 고용된 이들이 받는 급여는 자동으로 현재 법정 최저임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구직자들이 이 급여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민간 일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일 리 없기 때문이다.

일자리 보장제의 주창자들은 이 구상에 따라 만들어질 새로운 공공 일자리가 대개 광의의 돌봄 활동에서 나오리라 전망한다. 20세기에도 주로 사회 서비스 영역에서 복지국가의 공공부문 일자리가 창출됐지만, 우리 시대에도 지역사회의 돌봄 요구를 더 촘촘하게 충족시키는 노력 속에서 다수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또한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를 돌보는 활동, 즉 기후 위기 대처를 통해서도 많은 새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다. 게다가 눈을 돌려 보면, 관료적 행정과 민간 시장을 통해 해결되지 못하거나 사각 지대로 남은 삶의 문제들, 영역들, 가능성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따라서 일자리 보장제의 직접 목표는 완전고용이지만, 그 효과는 이를 훌쩍 넘어선다. 20세기 중반에 완전고용에 근접하려던 노력이 복지국가를 더욱 강화한 것처럼, 일자리 보장제는 더 강력한 복지국가인 21세기 '돌봄국가'를 발전시킨다. 산업 구조 변화나 생태 전환에 따라 발생할 대량 실업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돌봄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어주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해결하겠다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일자리 보장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있으며, 어쩌면 더 효과적으로 해결될지 모른다.

'사회'를 키우는 대안, 일자리 보장제

물론 일자리 보장제도 인간이 고안한 모든 정책의 숙명을 피할 수는 없다. 즉, 특유의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에도 단점이 있듯이, 일자리 보장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일자리 보장제의 경우에 그것은 관료기구의 한계와 무능에 대한 '정당한' 불신이다. 한 마디로, 국가가 급하게 마련하는 일자리가 얼마나 그럴듯한 일자리이겠냐는 것이다. 외환위기 때 실시된 공공근로 프로그램을 떠올려보면, 불신이 더욱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일자리 보장제 주창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는 여러 제안을 내놓는다. 이들 제안을 꿰뚫는 공통점은 재정은 국가가 대되 일자리의 기획은 관료기구에 맡겨놔선 안 된다는 것이다. 큰 방향이야 광의의 돌봄 활동이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지는 이런 활동과 연관된 다양한 시민 집단이 함께 참여해 기획하고 결정해야 한다. 가령, 재생가능에너지를 통한 발전 설비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일자리라면,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지역의 주민 대표와 에너지 협동조합, 노동조합 등이 기획에 함께 해야 한다.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아예 시민 집단이 먼저 일자리를 기획한 뒤에 사회적 심의 기구의 승인 절차를 거쳐 일자리 보장 프로그램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일자리 보장제는 또 다른 정책 대안인 참여소득과 아주 비슷해진다. 참여소득이란, 무조건적 기본소득과 달리, 사회적 의의를 인정받은 활동의 수행을 전제로 현금 수당을 지급하는 제도다. 생기 넘치는 시민사회가 주도권을 발휘하는 일자리 보장제란 어쩌면 참여소득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이다. 내가 기본소득에서 일자리 보장으로 '전향'을 감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유의 결점을 극복한 일자리 보장제, 참여소득과 흡사해진 일자리 보장제는 사회를 활성화하며 또한 이러한 사회가 전제되어야만 작동할 수 있다. 국가, 시장과는 구별되는 (시민)사회를 강력한 실체로 발전시키며, 역으로 이와 함께 해야만 제도 자체가 원활히 지속될 수 있다.

사실 이 '사회'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하면서 가장 참담하게 결핍된 요소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생태 전환은 국가기구만의 노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대기업과 기존 금융기관은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시민 모두가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를 통해 거들고 나서야만, 전환이 시작될 수 있다. 조직이라는 무기를 갖춘 시민들의 지혜와 열기가 만드는 자기장, 그것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시민)사회'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사회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본래 자본주의 자체가 자신의 '무덤 파는 이'를 먼저 무덤에 보내려는 경향이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 점에서 유별나게 탁월했다. 사회 안에서 가장 잘 조직된 집단인 노동조합을 부수거나 우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장 경쟁이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느라 시민들이 자신의 더 바람직한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러다 돌연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끝나고 지구 생태계 위기까지 닥치면서, 이제는 문명 전체가 '무덤 파는 이들'의 부재 탓에 시체더미가 되어가고 있다.

일자리 보장제는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앞에 소개한 것과 같은 형태의 일자리 보장제는 그 제도적 얼개 안에 사회의 각성과 활성화, 성숙의 요청을 담고 있다. 당장에 지역사회 안의 수많은 동료 시민의 삶이 걸린 대안을 제출하길 요구함으로써, 사회가 가장 빠른 속도로 잠에서 깨어나길 다그친다. 이 점에서 나는 대담한 생태 전환 노력과 함께 하는 일자리 보장제야말로 문명 붕괴로 향해가는 우리의 운명을 되돌릴 가장 강력한 반격의 시작이라 믿는다.

지금 곧바로 일자리 보장제가 실시되지 못하더라도 반격의 첫 발자국은 뗄 수 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선 지역의 뜻 있는 노동조합과 사회연대경제 조직, 그 밖의 주민 결사체들이 앞장설 수 있다. 지역에 필요하고 또한 지역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일자리들을 조사, 기획하며 선전할 수 있다. 이것 자체가 지역 시민사회의 역량으로 축적될 것이며, 이런 역량은 일자리 보장제가 실제로 시행될 때에 곧바로 이를 지탱하는 사회적 토대가 될 것이다. 대중이 주도하는 사회 변혁은 알지 못할 미래의 혁명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전향'이 '전향'이 아닌 이유

이것이 '전향'의 이유이지만, 실은 나는 전향하지 않았다. 기본소득을 버리고 일자리 보장을 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기본소득이 실현된 사회를 바란다. 그러나 '제대로' 실현되어야 한다. 1년에 몇 십 만원 수준의 이른바 '기본소득'이 아니라, 임금 제도를 허물어뜨리는 파괴력을 지닌 '진짜' 기본소득이어야 한다.

아마도 기후 위기와 산업 구조 격변을 거치며 퇴보와 붕괴의 운명을 피한 사회는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과 노동시간의 대폭 단축 및 공유가 함께 실현된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잠정적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그 시작은 현재와 같은 기본소득 논란일 수 없다. 다음 선거만을 내다보는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이런 논란은 제대로 된 기본소득으로 나아가는 가장 먼 우회로를 열 뿐이다. 그 길을 피할 출발점은, 역설적으로, 일자리 보장제와 이를 추진하는 정치-사회운동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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