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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홍명교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를 읽고

너무도 희귀한 동아시아 국제연대...한국과 중국 사회운동의 기적 같은 만남
  • 입력 2021.09.03 22:11      조회 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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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앞둔 일본인 A가 한국을 찾은 것은 1971년 겨울이었다. A는 그제야 막 대학을 졸업한 처지였다. 오랫동안 한 신좌익 정파에 속해 활동하고 전공투 투쟁에 앞장서서 경찰서를 들락날락한 탓에 졸업이 늦어진 것이었다. 늘 '혁명'을 입에 달고 다니던 A였지만, 전공투 물결이 별 성과 없이 수그러들고 좌익 정파 간 갈등만 심해지자 자꾸 어딘가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만 일었다. 그런 A가 문득 선택한 것이 한국행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막연한 목표 말고는 달리 계획도 없었다.

한데 뜻밖의 인연이 낯선 땅에서 A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A의 유일한 지인인 일본인 목사의 소개로 청년 몇이 A를 찾아왔다. 빈민운동을 한다는 그들은 일본에서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는 A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하룻밤 대화만으로도 A는 마치 어두운 감방에서 작은 창에 의지해 햇볕을 갈구하듯 바깥세상과 통하고 싶어 하는, 그래서 그들이 결코 외롭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의 열망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 만남 이후 A는 다시 자신의 투쟁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잊었던 동지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어느덧 친구가 된 이 청년들을 통해 A는 한국 사회 곳곳을 깊숙이 살펴보게 되었다. 청년들이 야학을 하던 판자촌에서는 광주대단지 사건이라 불리는 빈민 항쟁이 폭발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고, 야학 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비밀 작전 하듯 데리고 간 대학생 세미나에서는 일본에서는 한 물 간 마르크스주의 교재를 숨죽이며 토론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불과 1년쯤 전 전태일이라는 젊은 노동자가 분신 자결한 동대문 평화시장의 봉제 작업장에 방문한 경험이었다. 그곳에서 A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참혹한 작업 환경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고, 그 노동자들이 시작한 작지만 열띤 토론모임을 보며 새삼 희망이라는 감정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A는 한국 친구들과 자주 논쟁도 했다. 어눌한 한국어이지만, 수첩에 한자로 단어를 쓰며 이야기하면 뜻은 어지간히 통했다. A에게 익숙한 일본 사회과학 용어들은 이제 막 좌파 이념에 눈 뜬 한국 청년들에게도 공통어였다. 가장 빈번한 논쟁 주제는 1972년 여름에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이었다. 한국 동지들은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면서도 기적처럼 열린 남북 대화에 들떠 있었다. 성급하게 '통일'을 말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A는 찬 물을 끼얹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미국과 일본의 노림수를 말하며, 싸움은 늘 투사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장기전임을 환기시켜야 했다.

슬프게도 A의 어두운 예감은 너무도 일찍 현실로 닥쳤다. 1972년 가을,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개정을 공표했다. '통일' 헌법 제정을 빙자한 친위 쿠데타였다. 더불어 A가 중앙정보부 수사 대상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체할 수 없었다. A는 정든 한국 친구들과 제대로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황급히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로써 그냥 끝은 아니었다. 귀국한 A는 한국에서 보낸, 1년이 채 안 된 세월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사라진 나의 한국 동지에게>. 이 책은 1960년대의 치열한 투쟁이 오직 폐허로만 기억되던 1970년대 초 일본 사회에서 "과연 폐허뿐이냐"는 예기지 않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한 계기가 되었다 ...
 


그림1.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출처 : 빨간소금 출판사)


너무도, 너무도 희귀한 동아시아 사회운동의 국제연대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A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위에 풀어낸 A의 이야기는 모두 허구다. 1960년대 안보투쟁과 전학련, 전공투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냉전 질서에 도전하는 전위 구실을 하던 일본 사회운동과, 군부독재에 맞서며 어렵사리 부활을 모색하던 한국 사회운동을 잇는 이런 만남은, 안타깝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물론 청계천 빈민운동과 연대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사례나, 일본 안에서 전개된 김지하 구명운동의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젊은 운동가들의 직접적 교류는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동아시아의 비극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장 왕성한 중심지가 된 동아시아의 가난함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과 비교하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때는 물론 유럽이 자본주의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당시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자본만 급성장한 게 아니라 이에 맞서는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 또한 성큼성큼 전진하고 있었다. 더구나 각 나라의 노동계급운동이 국내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국경을 넘어 서로 긴밀히 연대했다. '인터내셔널'이라는 조직까지 만들어 일상적으로 교류하고 중대 사안을 함께 결정하기도 했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지는 않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결국 유럽 전체가 전쟁에 빠져드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형제자매'라 불렀던 각국 노동자들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학살에 동원됐다. 국제연대를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총점을 매기자면 국제주의가 민족주의에 철저히 패배한 꼴이었다.

그러나 지금 동아시아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의 국제연대 자체가 거의 없다. 과거 유럽에서는 국제연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면,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시도조차 아예 없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국수주의 열풍에 패배한 격이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동아시아 나라들은 유럽만큼 교류가 활발하지 못하고 이게 사회운동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만큼 민족주의가 유럽보다 더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진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직접적인 이유는 공간보다는 시간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세 나라는 서로 상당한 시간 격차를 보이며 자본주의의 중심에 합류했다. 다들 알고 있듯이, 일본이 먼저, 그리고 한국, 중국 순서였다. 한데 각 나라의 사회운동은 전성기를 한 세대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비교적 일찍 단명(短命)하는 양상을 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의 사회운동은 그랬다.

그 결과는 치명적인 '어긋남'이었다. 일본에서는 20세기 말에 이미 사회운동이 노쇠해 버렸다. 그래서 옆 나라(남한)에서 사회운동이 한창 절정을 구가하던 1980년대 말-1990대 초에 일본에서는 전투적 노동운동(총평)이 사라지고 좌파정당(사회당)이 사멸하고 있었다. 다시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시작된 사회운동이 노쇠해가고 있다. 바로 이때에 또 다른 옆 나라(중국)에서는 '사회주의'를 내건 정권의 억압에 맞서 새롭게 사회운동이 대두하는 중이다.

예정대로라면, 첫 번째 어긋남에 이어 두 번째 어긋남이 벌어질 차례다. 일본과 한국의 사회운동이 서로 만나지 못해 위의 A 이야기가 영영 허구가 된 것처럼,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사회운동 역시 만나지 못하고 그래서 어떤 이야기도 남기지 못한 채 제 운명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진 나의 한국 동지에게>가 불발하게 된 아쉬움을 덮고 남을 어떤 희귀한 만남이 성사됐고, 우리는 그 만남의 현장을 고스란히 책으로 접할 수 있게 됐다. 바로 홍명교의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베이징에서 마주친 젊은 저항자들>(빨간소금, 2021)을 통해서다.

홍명교는 영화감독 지망생이고 문필가인데, 그 전에 우선 사회운동가다. 대학 다닐 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하는 활동을 벌였고, 진보정당운동에도 열심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삼성그룹에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세우고 지키는 데 헌신했다. 그러나 고단한 투쟁, 그 중에서도 삼성 재벌과 정면으로 맞붙었던 경험이 젊은 그조차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 그가 찾은 탈출구가 느닷없는 베이징 행이었다. 중국어를 배우려 한다는 막연한 이유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늙어가는 사회운동의 고단함을 등에 지고 이국땅을 밟은 그에게 뜻하지 않은 만남들이 닥쳐온다. 그가 중국에 머문 2018년은 하필이면 광둥성 선전시 자스커지 공장에서 자주적 노동조합을 세우려는 노동자의 투쟁이 폭발한 때였고, 시진핑 집권 이후 가속도를 붙이며 성장하던 대학가의 청년 좌파 그룹들이 노동자 투쟁에 과감히 연대하기 시작한 때였으며, 관변의 카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와 이러한 투쟁이 극명히 대비되던 때였다.

조건이 조금만 바뀌었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 중국 당국은 곧바로 자스커지 노동자와 좌파 대학생의 연대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홍명교가 베이징을 떠나는 2018년 말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공안에 연행된 상태였다. 2019년이 되면 직접적 탄압의 영향권이 홍콩으로까지 넓어지고, 그 해 말부터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돼 중국 내 사회운동도, 정권의 탄압도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것만으로도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에 담긴 만남이 얼마나 희귀한 사건인지 알 수 있다. 단지 희귀한 것만이 아니다. 이 책에 담긴 모든 대화와 일화는 '만남'이란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절실하고 벅찬 의미를 지니는지 웅변한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 속에서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난다는 역설을 잘 보여준다. 중국 친구들을 만나는 저자 홍명교는 서울에서 미처 대면하지 못했던 자신을 다시 만나고, 우리는 또 저자를 통해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난다.

<사라진 나의 친구에게>에 기록된 장면들 하나하나마다에서 우리는 2018년 말에 갑자기 하나 둘 사라진 베이징의 젊은 사회운동가들도 마주지치만, 또한 사라진 우리 자신의 모습도 본다. 권력에 쫓겨 거리를 방황하고 고통 받는 또 다른 이들과 연대하려고 헤매던 우리를 본다.

그러나 이렇듯 교차하는 만남들 속에서 결국 확인하는 것은 그 무엇도 헛되이 사라지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진실이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에서 만나는 사라진 우리의 옛 모습도, 만남 속의 이러한 되새김을 통해, 오히려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겹겹의 만남 속에서 마주하는 이런 당혹스러운 진실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다시 한 발자국 전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우정과 연대가 열어놓는, 흔치 않은 가능성이다. 너무 비일상적이기에 실감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홍명교의 책에 관한 어줍지 않은 소개는 이쯤에서 그치려 한다. 그가 겪은 만남들을 함께 느끼려면, 무엇보다도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를 반드시 직접 읽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가 미래의 씨앗이 되길

실은 이번에도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역사의 경로는 이미 한 궤도 안에 갇힌 듯 보인다.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사이에도 국수적 민족주의의 경쟁과 갈등이 대세가 된 것만 같다. 인터넷 여론만 보면, 이를 확신하지 않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가 함께 하길 권하는 만남들이 정말로 다른 미래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이런 만남들의 의도된 반복이 과연 역사의 경로가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만드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미래를 장담할 수야 없지만, 홍명교의 책이 증명하는 틀림없는 진실에 더 많은 이들이 눈을 뜬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 진실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 측면은 한국, 중국, 일본, 각 나라에서 사회운동이 마주하는 적대자들은 너무도 제 각각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지배자들도 무척 다르지만,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중국까지 포함하면 그 차이는 가히 태평양 수준이다.

그러나 진실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사회운동에 나선 민중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욱 더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렇고, 중국의 신세대 농민공이 그렇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는 책 전체가 이 단순한 진실의 증언이다. 닮았기에 통할 수 있고, 통하기에 연대를 도모할 수 있다.

지금껏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서로 무척이나 다른 각자의 상전들의 얼굴을 마치 자기 얼굴인 양 여기며 반목하고 혐오해왔다. 그러나 눈길을 조금이라도 돌려, 놀랍도록 닮은 서로의 얼굴을 직시한다면?

희망은 항상 그 보편성 쪽에 있고, 이번에도 우리는 여기에 내기 말을 걸어야 한다. 바로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속 '사라진 친구들'이 우리가 그렇게 믿고 과감히 선택할 가장 강력한 근거다. '사라진 친구들'은 저자 홍명교에게 그러했듯이 도리어 우리를 격려한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