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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자신의 정치관에 패배 당하고 있는 민주당

민주당에게 부메랑이 된 '적폐청산'
  • 입력 2022.02.23 16:18      조회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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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대통령 선거의 공식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양대 정당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팽팽히 맞섰는데, 지금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앞서는 추세다.

물론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1992년 대선의 '초원복국' 사건도 있듯이, 선거 판세는 투표일 당일까지도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다. 이 글이 공개되고 나서도 또 어떤 돌발 변수 때문에 추세가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여론조사 전문가가 보더라도 현재 윤석열 후보가 더 유리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줄곧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후보 개인의 약점도 있겠고, 선거운동의 단기적 실책이나 오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더불어민주당 자체의 문제다. 더불어민주당은 지금 더불어민주당 자신에게 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당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정치관에 패배당하고 있다.

촛불 이후 민주당이 '적폐 청산'을 통해 증폭시킨 정치관

사실 윤석열 후보만 놓고 보면, 지지율이 평소보다 올라가거나 높게 유지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출렁일 때마다 이는 항상 후보 개인과 소속 정당의 문제나 실책 탓이었다. 오죽 하면 상대당의 '괴물' 후보가 싫어 '식물' 대통령을 선택하겠다는 윤석열 후보 지지의 변이 다 나오겠는가.

윤석열 후보 지지율의 힘은 대부분 '정권 심판 및 교체' 여론에서 나온다. 모종의 계기로 정권 교체 여론이 재결집할 때마다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거나 높게 유지되었다. 최근에는 "당선되면 전임 정권의 부패를 수사하겠다"는 윤석열 후보 발언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노기어린 대응이 이런 계기 역할을 했다. 이 대응은 의도하지 않게 잠자던 정권 교체 여론을 깨웠고, 그 뒤에는 윤석열 후보 지지율이 좀처럼 하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성난 파도와 같은 민심'이라는 상투어구가 결코 상투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국면이다. 그만큼 정권을 다른 정당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민심이 수그러들 줄 모른다. 투표일까지도 이 흐름은 쭉 이어질 듯하며, 이재명 후보가 충격적인 방식을 통해 '여당 내 야당'이라는 2012년 대선의 박근혜 후보 같은 위상을 되살리지 않는 한 이를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이 민심의 밑바탕에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 불이행과 실정을 향한 반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시민 다수의 정치관이 있다. 그 정치관에 따르면, 대통령 선거는 '왕의 목을 치는' 고전적 민주주의 혁명의 반복이다. 부패가 드러났거나 무능한 정치 세력은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들 대통령감은 아니라고 여기는 후보를 3월 9일에 '짱돌'로 써먹겠다는 심리에는 (병적 징후라기보다는) 이런 장중한 면모가 있다.

그런데 이런 정치관이 한국인의 생래적 특성이냐면,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교과서를 읽어야나 알 수 있는 먼 과거 역사나 DNA로 결정되는 정치관 따위는 없다. 항상 최근의 정치적 경험들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가장 나이 어린 유권자들도 기억할 정도로 가까운 과거의 정치적 사건들이 시민의 정치관을 담금질하고 정치 행위를 유도한다. 정권 교체의 결의에 찬 작금의 다수 유권자들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정치 세력이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다. 촛불 개혁을 약속하고는 박근혜 정부와 꼭 마찬가지로 5년의 시간만 낭비하여 정권 교체 민심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적극적인 공헌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는 집권 5년 내내, 현재의 정권 교체 여론과 동일한 정치관을 고수했고 이를 최대한 조장했다. 취임 초기에 이들은 촛불 항쟁의 거대한 여파와 국회 내 다당 구도를 창과 방패삼아 그들 자신의 대선 공약에 담긴 사회 개혁을 충분히 추진할 수 있었다. 모처럼 민주자유당 계승 진영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뉜 원내 지형이야말로 집권당이 '정치'의 묘미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게 '정치'란 그런 게 아니었다. 대신 이들은 '적폐 청산'을 부르짖었다. 양대 정당 독점 정치의 반대쪽 진영을 '적폐'로 규정하고는 그들의 목을 베겠다고 선포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를 향한 분노가 식지 않았던 때이므로 이 선언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수백만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경험 끝에 등장한 정권이 내세운 새 정치의 이 내용에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는 수긍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의 본령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 세력을 확실히 심판하는 것이라는 정치관이 굳어져갔다.

사실 선언만큼 실제로 처단의 시도들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검찰 등의 저항으로 '적폐 청산'이 좌절됐다고 울분을 토하지만, 현실에서 목격된 것은 처단은커녕 기이한 담합이었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은 지방의원 2인 선거구를 최대한 늘리는 합의를 통해 자유한국당이 기사회생해 양당 독점 정치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었고, 2020년 총선에서는 사이좋게 비례위성정당을 만들어 이 짓을 반복했다. '적폐'의 본산이라 할 정당을 이토록 애지중지했으니 도대체 '청산'은 어디를 향했던 것인가?

이렇게 '적폐 청산'을 연극 소재로 써먹던 더불어민주당의 정치관이 이제는 더불어민주당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있다. 촛불 '혁명'이라는 구호에 미심쩍어 하면서도 일단 박수를 쳤던 많은 이들이 대선을 맞아 이 구호의 밑바탕에 깔린 정치관을 다시 충실히 실행하려 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집권 세력을 과감히 처단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이다. 이 결의 앞에서는 이재명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이 어떤 새로운 약속을 내놓아도 먹히지 않는다. 촛불 시민들이 죽은 게 아니라 바로 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집권당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관도 교체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한바탕의 소극(笑劇)이다. 동서고금에 권력자가 자기 꾀에 당해 거꾸러지는 광경만큼 민중 입장에서 고소하고 통쾌한 구경거리도 달리 없다.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이 아니다. 이들의 운명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를 시야에 놓으면, 소극은 비극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의 자업자득이 된 그 정치관이 우리를 계속 불행하게 하고 실패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대선 결과에 목 매달 게 아니라 대선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어차피 양대 정당 후보들 가운데 어느 쪽이 당선되든 정치 위기는 피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 정권 교체 민심만으로 당선된 정치 이력 1년짜리 대통령이 180여 석의 야당과 할 수 있는 일이란 위기 놀음뿐이다. 이재명 후보가 어찌어찌 당선되더라도 정권 심판 민심은 시뻘겋게 살아 있으니 이를 어떻게든 풀어나가야 한다. 그때는 또 그때대로 안개 속일 것이다.

이런 끝없는 정치 위기 속에서 다시 기존의 다수파 정치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선택한다면, 유권자들은 몇 년 뒤에 또 집권 세력을 심판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윤석열 정부에서라면, 다시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촛불을 들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에서라면, 다시 국민의힘과 함께 그 당 국회의원 말고 다른 대통령 후보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 무려 2020년대 말에도 말이다.

5년에 한 번씩 자코뱅의 빨간 모자를 꺼내 쓰고 갑오년에 조상들이 못했던 일을 거듭 하니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민주 시민의 영광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이에 부유층, 상위 중산층과 나머지 계층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기후는 더 빨리 돌변하는데, 한국은 여전히 석탄 화력 발전소를 돌리며 식량 대부분을 수입해 먹고 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여전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급하다고 느끼는가? 더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겠다고 절감하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집권당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관도 교체해야 한다. 달랑 두 정치 세력을 향해 교대로 돌을 던지며 대단한 민주주의라 생각하는 정치관을 되돌아봐야 한다. 혁명의 외양을 흉내 내지만 이런 정치관에 따른 선택들이 과연 조금이라도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냈던가? 대선이 '사이비 혁명' 구실을 하는 가운데에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의 개혁조차 막혀왔다. 집권당은 갈아치워도 차별금지법이나 제대로 된 노동관계법은 통과시키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출구는 더불어민주당이 오만방자하게 가로막았던 그 가능성을 되살리는 데 있다. 단 두 개의 정당이 아니라 한국의 시민사회에 어울리는 여러 개의 정당들이 펼치는 정치 말이다. 양대 정당 독점 정치가 아닌 다당 경쟁과 합의에 따른 정치. 실질적인 개혁의 가능성은 '사이비 혁명'의 가상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이쪽에 있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에서는 역설적으로 이 경우가 '정치 혁명'이란 말에 더 어울린다.

어차피 양대 정당 중 어느 쪽이 승리하든 위기와 혼란은 필연이다. 그러니 이번 대선에서부터 이 새로운 정치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선택하자. 미래의 개헌이나 정치제도 개혁을 기다릴 게 아니라, 아니 이를 앞당기기 위해서도, 당장 대선 결과에서부터 다당 정치를 더욱 강력한 현실로 만들자. 제6공화국 역사상 가장 당혹스러운 이 대선에서는 오직 이런 선택만이 '역사적 유효표'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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