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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와 조세

[그래도 진보정치] 기본소득만이 대안은 아니다

  • 입력 2021.03.04 16:00      조회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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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대선까지 쭉 논란이 계속될 기세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고민해볼 만한 대안에 기본소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보장제’ 혹은 ‘고용보장제’도 있고, ‘참여소득’ 구상도 있다.

고용보장제란 국가가 일자리를 찾는 모든 이에게 책임지고 일자리를 제공하자는 제안이다. 민간 기업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다면, 국가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 이렇게 국가가 ‘최종고용자’ 역할을 맡음으로써 실업을 종식시키자는 것이다.

한데 이 제안에는 커다란 약점이 하나 있다. 국가가 현실의 관료기구를 뜻한다면, 고용보장제를 통해 제공되는 일자리가 적성이나 능력 개발, 보람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대안으로 관료기구가 아닌 시민사회가 일자리의 내용을 채우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사회에 꼭 필요한 활동들이 무엇인지 시민사회가 결정하고 이런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참여소득이 바로 이런 구상인데, 참여소득과 고용보장제는 이렇게 내용이 상당히 중첩된다.

한국 정치권에서 갑자기 기본소득이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데에 비하면 고용보장제나 참여소득은 아직 그리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더 적합하고 절실한 대안은 오히려 고용보장제나 참여소득일지 모른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우선 기본소득 등의 새로운 대안들이 제출된 배경을 짚어야 하며, 이는 다시 20세기 복지국가의 복기로 이어진다.

지난 세기에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상당 기간 지속된 복지국가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대다수가 다양한 복지제도들을 떠올릴 것이다. 한데 역설적이게도 복지국가의 핵심은 복지제도가 아니었다. 완전고용이었다. 전후 복지국가는 케인스주의 경기조절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완전고용을 장기간 지속시켰다. 덕분에 대다수 가구가 임금소득을 통해 중산층 수준의 살림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복지제도는 이런 안정된 임금소득을 보조하는 장치였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기존 복지국가에서 이 중핵, 즉 완전고용을 앗아갔다. 그래서 유럽 여러 나라에 아직 복지제도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더는 복지국가의 시대라 하지 않는 것이다. 실업이 늘어나고 절반쯤 실업이나 마찬가지인 불안정고용이 주가 된 상태에서는 복지제도조차 옛날만큼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곳곳에서 대두한 ‘복지국가 부활’의 목소리는 실은 ‘완전고용을 되살리자’는 외침이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제출된 대안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를 주로 새로운 ‘복지제도’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이는 본래 ‘완전고용’을 대체할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산업구조 변경 등으로 이제는 완전고용을 복원할 수 없으니 복지국가의 중핵을 새로운 방식으로 채우자는 것이 애초 취지다. 그리고 이 취지에 부합하자면, 기본소득은 전국민에게 지급되면서 동시에 최저생계비를 상회해야 한다. 적어도 지난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앤드루 양이 내건 1인당 월 1000달러(약 110만원) 수준은 되어야 한다.

한데 지금 한국 정치권에서는 단계적 도입을 명분으로 내걸며 아주 미미한 액수의 수당을 ‘기본소득’이라 포장하거나, 기본소득을 실시하려면 기존 복지제도를 다 없애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기본소득의 본령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기본소득은 완전고용을 대신하려는 방안이며, 완전고용 혹은 그와 비슷한 상태의 실현은 지금 우리에게 결코 먼 미래의 멋진 청사진일 수 없다. 이것은 절박한 당면 과제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그 독특한 난점 때문에 당장 제대로 실현되기 힘들다면, 기본소득에만 매달릴 이유가 없다. 고용보장제와 참여소득 또한 탁자에 올려 진지하게 함께 검토해야 한다. 기본소득 논쟁은 기본소득을 넘어서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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