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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이윤이 아니라 생태적 이성이 기준이 되는 일상의 변화

인류의 끔찍한 미래, 우리가 훈련해야 할 것은 '생태적 이성'
  • 입력 2021.08.19 14:00      조회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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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들어 기후위기 관련한 중요한 문서들이 잇따라 나왔다. 5일에는 한국의 탄소중립위원회가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반응은 양 극단이었다. 기후운동에 나선 이들은 이 문서가 제목과는 달리 2050년까지 탈탄소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반면에 또 다른 많은 이들은 탈탄소가 아닌 '저탄소'에 목표를 맞춘 이 문서의 시나리오들조차 너무나 큰 폭의 변화를 요구하는 형편이니 도대체 '탄소중립' 자체가 실현 가능한 목표가 맞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며칠 뒤에는 UN 산하 기구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제6차 보고서를 공개했다. 엄청난 분량이지만, 결론은 냉혹하리만큼 간단하다. 인류에게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이상 높아지는 예상 시점을 2040년으로 앞당겨 잡았다. 이 보고서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2050년까지 '저탄소'를 실현하겠다는 한국 탄소중립위원회의 시나리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한국 같은 부유한 산업국은 2050년보다 더 빠른 시점에 탈탄소 사회로 전환해야만 한다.

한데 IPCC 6차 보고서에 대한 반응도 탄소중립위원회 시나리오의 경우와 비슷했다. 기후재난이 급진전되고 있으므로 더욱 과감하고 신속하게 생태적 전환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물론 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의 심정은 자포자기 쪽에 가까운 듯하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느냐며 회의하거나 자기합리화에 빠진다. 심지어는 기후위기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이들 가운데에도, 기후변화가 앞으로 계속 가속화한다면 2050년까지 탄소 제로 상태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세워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목소리가 있다. 지구는 벌써 기후과학자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재앙의 되먹임 작용을 시작했는데, 지금부터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사고는 자기최면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결론은 지금 당장 생태적 전환에 나서야 한다는 열띤 외침을 향한 냉소가 된다.

과연 그럴까? 탄소 배출을 줄여 온난화를 일정 수준으로 묶어둔다는 목표가 진즉에 현실에 추월됐으므로 탈탄소 노력은 헛된 몸부림에 불과한가? 혹은 2050년까지 탈탄소 사회로 전환한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머릿속 목표에 불과하니 그저 손 놓고 멸망을 기다리는 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인가?

탄소 배출을 줄이는 과정에서 사회가 훈련해야 할 것, 생태적 이성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선 최악의 미래 상황을 가정해보자. 2050년이 되어도 주요국 중 많은 나라가 탄소 제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래서 지구 전체에 여전히 상당량의 탄소가 배출되는 경우 말이다. 이때 지구 온난화와 이에 따른 기후급변은 IPCC 새 보고서가 예측하는 대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최악의 경우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인류가 2050년쯤 탄소 제로 상태를 얼추 달성했는데도 지구 대기 시스템이 기후과학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혼돈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이 경우에 인류에게는 '타오르는 지구'에 적응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게 된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길 바란다. 이러한 경우들을 상상해보자는 것은 결코 2050년 탈탄소 목표가 실현될 수 없다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나 기후위기 같은 대혼돈 속에서 우리가 항상 새로운 출발점을 가리키는 안내자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다. 따라서 기후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른 미래 전망과 탈탄소 목표 설정은 반드시 존중돼야 한다.

그런데도 위의 상황들을 머릿속에 그리는 까닭은 기후위기의 거대한 양상과 2050년 탈탄소 목표의 막중함이 행동을 촉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럴 의지를 억누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혹은 당장 어떤 행동에도 나서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좋은 변명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것과 같은 최악의 미래 상황들에서도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려고 노력해온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생존과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참으로 거대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탄소 제로 상태의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어느 사회에든 기후재난은 닥치겠지만, 이에 맞서서 생존을 확보하고 문명을 최대한 보전할 가능성은 각 사회가 그간 생태적 전환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가령 에너지 전환을 보자. 여기에서 전환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재생가능에너지 비중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이를 놓고 지금은 재생가능에너지에 100% 의존하는 전력 시스템이 과연 가능하냐, 100%는 고사하고 이게 중심이 되는 전력 시스템조차 가능하냐가 쟁점이 돼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차피 정확히 예견할 수도 없는 그런 미래 기술 수준이 아니다. 핵심은 사회가 재생가능에너지 중심의 새로운 전력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도중에 있느냐, 아니냐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가 닥치든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역량을 이미 확보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미래 어느 시점에 재생가능에너지 비중이 몇 %인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이미 새로운 전력 시스템으로 나아가는 궤도 안에 들어선 사회라면, 이를 가속화할 수도 있고 어떤 예측 못한 상황이 닥치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반면에 현실의 어려움을 들며 전환을 계속 미뤄온 사회는 기후재난이 예상치 못한 양상을 띨수록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이다. 전환의 기반도, 경험도 쌓지 못했기에 더욱더 전환에 나서지 못하는 지경이 될 것이다.

농업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현재 충분히 부각되지 못하는, 기후급변의 가장 심각한 재앙은 식량 위기다. 전 세계 주요 농업 지대 곳곳의 홍수, 가뭄, 병충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존 작물의 생존 조건이나 환경 적응을 추월하는 기온 급상승으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식량 위기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생태적 전환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는 농업 회생이어야 한다. 지구 온난화의 변곡점이었던 1990년대에 농업을 포기한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한데 농업에서도 회생의 목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는 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기존 농업의 붕괴가 너무 심각해 식량 자급률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어쩌면 식량 자급률 몇 %를 달성했는지 자체는 아니다. 농업이 지속적으로 회생하는 과정에 있는가, 아닌가가 더 중요하다. 전자의 경우라면 식량 위기가 더 급박해지더라도 이미 쌓인 경험과 자원을 통해 위기에 필사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라면, 1990년대 북한의 기아가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 이야기를 도시를 놓고도 할 수 있다. '15분 도시' 같은 구상을 추진해왔기에 도보나 자전거, 대중교통이 이미 중심 이동 수단이 된 도시와 그렇지 않은 도시, 둘 다 최악의 기후위기가 닥치면 예외 없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 그러나 전력난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 시민의 품격을 최대한 유지하며 버틸 수 있는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는 확연히 나뉠 것이다. 어느 쪽이 전자이고 어느 쪽이 후자일지는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빤하다.

정리하면, 기후위기에 맞서는 생태적 전환에서 중요한 것은 2050년까지 탈탄소화 같은 구체적인 목표의 달성만은 아니다. 물론 이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물신화된 유일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중요한 것,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런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체득하는 역량이다. 탈탄소화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쌓이는 경험과 자원, 새로운 행동양식과 문화야말로 기후위기를 견뎌낼 미래 인류의 최대 무기다.

노동운동의 고전인 K. 마르크스와 F. 엥겔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구가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단결이 계속 확대되는 데 있다." 여기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자리에 "탈탄소 노력"을 대입해보자. 그럼 이런 문장이 뒤따라 나올 것이다. "탈탄소 노력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태적 전환의 역량이 확대되는 데 있다."

이러한 생태적 전환의 역량에는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최근에 회자되는 말들로는 '회복 탄력성' 등이 있다. 하지만 나는 '생태적 이성'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개념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성을 대체하는 생태적 이성, 이것이 갖추어질 때에만 인간 사회는 지구 생태계 위기를 어떤 식으로든 헤쳐 나갈 수 있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과정에서 사회가 정작 더 중요하게 훈련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생태적 이성이다.

이윤이 아니라 생태적 이성이 기준이 되는 일상의 변화

한데 아직 답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몇 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몇 % 줄인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사회 전체를 바꿔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런 목표에 따라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일상을 바꾸고 그러도록 계속 채근한다는 게 도대체 있을 법한 일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부정적 답이 향하는 곳이 곧 기후위기 패배주의, 즉 기후급변에 맞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태도다.

그러나 이런 물음에는 의외로 쉽게 대꾸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나날이 거창해지는 어떤 목표에 맞춰 일상을 끊임없이 바꿔가며 살고 있다. 그렇게 살도록 만드는 힘이 너무나 강력한데도 마치 중력처럼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 목표란 자본의 이윤 축적이며, 이는 총량으로는 흔히 경제성장률(GDP)로 표시된다. 자본의 이윤 확보 목표에 맞춰 지금도 우리는 몸과 마음부터 집과 동네, 나라 전체에 이르는 모든 것을 어지러울 정도로 급속히 바꾸며 살아간다.

우리가 결단해야 할 것은 다만 그 목표의 자리에 '자본의 이윤 확보' 대신 '탄소 배출 감축'을 넣는 일이다. 생각보다는 그다지 복잡하거나 낯설지 않은 전향일 뿐이다. 더구나 과거의 그 목표에 따라 끊임없이 변신을 강요받던 삶은 우리 중 다수에게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고 미련이 남을 만큼 정답거나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성에 좇기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생태적 이성을 새롭게 습득해가는 삶은 보기보다는 인내와 고통이 아닌 기회와 해방 쪽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게다가 십중팔구는, 이제껏 목표를 정하기보다는 그것에 따라야 하는 삶을 살았던 인류 대다수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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