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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를 읽고 실현하는가

여기, 피할 수 없는 질문...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
  • 입력 2021.07.21 10:00      조회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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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매혹적이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광채가 사라지는 사상가가 있는가 하면, 유행을 타는 듯 보였으나 세파에 시달리고 고난을 겪을수록 다시 펴보게 되는 이도 있다. 내게 슬라보예 지젝은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더욱 그러하다.

석학이라 여겼던 조르조 아감벤 같은 이가 온갖 고상한 논리를 동원해 마스크 쓰기 싫다는 투정이나 늘어놓을 때에 지젝은 함께 자가 격리를 견디고 있는 동료 인간들에게 사유의 실마리를 풀어놓느라 안간힘을 썼다. 팬데믹이 시작되자마자 몇 달만에 나온 저작 <팬데믹 패닉: 코로나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0)나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이택광과 공저, 비전C&F, 2020)은 초유의 사태 속에서 생각의 길을 잡아나가는 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되는 개입이었다. 적어도 그 국면에서는 지젝이야말로 인류에게 철학의 존재 이유를 확인시켜준 거의 유일한 철학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개입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장기화하는 만큼 지젝의 개입도 끝날 줄 모른다. 며칠 전에 그의 신작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1)가 나왔다. 영어로는 작년 말에 출간된 책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백신 접종이 진행 중인 지금 읽어도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슬프게도 팬데믹 국면이 크게 바뀌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사태의 핵심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1.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출처 : 북하우스)
 

피해선 안 될 물음 -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

지젝의 다른 저작들이 그렇듯이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도 주제를 압축하기에는 관심의 방향도 종잡을 수 없이 다채롭고, 다루는 소재도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 위기를 연결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인간의 두뇌를 디지털 네트워크에 직접 접속하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망상을 해부하는가 하면 미국과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벨라루스의 민주화 시위, "흑인의 삶은 소중하다" 운동 같은 이질적인 정치적 흐름들을 넘나들며 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다. 직접 읽어보지 않고는 특색과 성취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든 책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내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 책의 중요한 메시지는 "과연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라는 물음이다. 어쩌면 현 시국에 이런 물음은 동료 시민들에게 짜증만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이 만 2년을 향해 가는데도 도무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 나아지겠거니 했지만, 곳곳에서 변종 바이러스가 출몰한다. 늦어도 올 연말이면 끝나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4차 유행 시작과 함께 이는 '지나친' 낙관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펜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라 묻는다면, 너무 잔인하거나 물정 모른다고 타박이나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눈치라고는 보는 법이 없는 이 철학자는 주저하지 않고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궁극적 선택은 이렇다.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팬데믹이 우리가 새로운 '포스트휴먼'의 시대(인간됨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지배적 인식과 관련한 '포스트휴먼')에 들어서고 있다는 신호 중 하나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이는 우리의 심리적 삶과 관련된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론적' 선택이며,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과 맺는 모든 관계에 결부된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163쪽)

그리고 그가 권하는 답 역시 냉정하기 이를 데 없다. 위로보다는 도전을 강권하는 주치의의 목소리다.

"탈인간(포스트휴머니티)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낡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는, 힘들고 고통스런 길로 나서야만 한다. 이 건설 작업은 의학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속속들이 정치적 문제다. 우리는 사회적 삶 전체를 새로운 형태로 발명해야만 한다." (위의 책, 166-167쪽. 강조는 원저자의 것)

왜 낡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가?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전체가 이에 대한 강력하고 입체적인 논변들인데, 내가 보기에 그 중에서도 핵심은 펜데믹 국면의 위기 상황이 결코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생긴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은 이전에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위기가 팬데믹 국면에 우리 턱 앞에서 폭발했을 뿐이다. 어떤 위기들인가? 내 나름대로 몇 가지 줄기를 잡아 정리해보면, 이렇다.

첫째, 팬데믹과 함께 흔히 '비대면'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미래 자본 축적의 복된 가능성을 보고 '디지털 뉴딜'의 깃발까지 흔들어대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혼돈과 디스토피아의 검은 그림자에 경악한다. 재택근무가 일상화할수록 집 안까지 회사의 명령 체계에 점령당하고, 비대면 수업이 장기화할수록 계급-계층에 따른 학습 능력 격차가 더욱 커진다. 팬데믹 전에는 회사와 학교에 가기가 그토록 싫었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이 하루빨리 이 사태가 끝나 다시 가정과 회사, 학교가 분리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바이러스 비상 사태 때문에 갑자기 닥친 일이 아니다. 이미 준비되고 무르익어가던 경향이 '혁명적 위기'(?!)를 맞아 작렬하는 것뿐이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론의 실체인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공장과 사무실 담벼락을 넘어선 자본-노동 관계의 시공간 확장을 내포하고 있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모든 교육 체계의 격동을 예고했다. 이 필연적 경향이 드디어 때를 만났을 따름이다. 이제는 누군가처럼 '디지털 뉴딜'의 깃발에 편승하든가,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대변혁을 타진하든가,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았다. 좋았던 옛날(정말 좋았었는지는 의문이지만)로 돌아갈 길은 막혀 버렸다.

둘째, 바이러스 대유행과 함께 흉하게 드러난 또 다른 심각한 질병이 있다. 경제-사회적 불평등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소리 소문 없이 일자리를 잃고 영세 자영업자는 코로나 2년째를 견디지 못해 멸종해 가는데, 어느 나라든 디지털 산업과 연관된 초거대 자본은 팬데믹 시기에 오히려 전대미문의 엄청난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다.

시야를 일국을 넘어 지구 전체로 확장하면, 더욱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가 조만장자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진화하는 그 순간, 최빈국들은 외채 이자를 상환하느라 코로나19 대응을 포기해야 할 처지다. 마스크를 참지 못하는 자본주의 중심부의 일부 시민들이 '저항'이라는 말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동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콜롬비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진짜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이들이 목숨을 건 봉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런 경제-사회적 불평등 역시 펜데믹의 산물이 아니라 그 전부터 지구상을 지배하던 단단한 구조다. 그러나 팬데믹이 이 구조를 둘러싸고 전혀 새로운 상황을 연 것만은 분명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불평등이 더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최후통첩을 인류에게 전했다. 더 이상 있어도 없는 듯 치부하거나 미래의 숙제로 미루고 미룰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세 자영업자나 택배 노동자, 돌봄 노동자의 처지를 그대로 두고서는 봉쇄 혹은 준봉쇄를 반복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이제는 정치인과 언론의 식상한 탄식만이 아니라 '긴급한' 조치들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평소에는 수탈 대상이 되거나 방치될 뿐이던 남반구 국가들에 대해서도 더는 그런 대우를 지속할 수 없다. 그렇게 버려졌다가는 이들 지역에서 언제 또 델타와 람다의 뒤를 잇는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 지구 질서는 백신 유통을 비롯해 외채 상환에 이르는 모든 방면에서 전복돼야 한다.

셋째, 코로나19 대유행은 기후 위기 가속화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둘은 인류의 의식-무의식 속에서 서로 뗄 수 없이 얽히기에 이르렀다. 신종 바이러스 확산과 기후 위기의 연관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의 지적이 있다(가령, 안드레아스 말름,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우석영 외 옮김, 마농지, 근간예정] 참고). 하지만 코로나 원년인 2020년부터 유독 기후 위기가 세계 곳곳에서 충격적인 재난으로 가시화되고 있기에 둘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굳이 '과학적' 설명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한데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 펜데믹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후 위기를 바라보는 많은 시민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 확산이라는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각국은 전에 없던 사회적 선택을 단행했다.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고, 의료 체계 전체를 마치 공공부문인 듯 움직이고, 일회적인 보편적 기본소득 비슷한 정책을 펼쳤다. 지젝이 "전시공산주의"(133-139쪽)란 생경한 이름을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낯선 결단이었다.

이 경험을 겪고 난 뒤에 우리의 인식은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전시공산주의"라고나 할 그 조치들은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귀에 군살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말들과 달리 전혀 '실행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럼 바이러스 대유행에 맞서 이를 실행할 수 있다면, 기후 위기라는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재앙 앞에서는 왜 비슷한 선택을 할 수 없는가? 아니, 왜 이제까지 우리는 그런 선택을 꿈도 꾸지 못했던가? 팬데믹 이후에 분명해진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전부는 아니고 다수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상당수 시민들이 이 사실을 간파하기 시작했고, 일단 풀려난 이 과정을 돌이키기란 불가능하다. 여러모로 우리는 펜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꿈꾸는 것이야말로 대파국으로 가는 편도 차선에 몸을 싣는 일이다.

유토피아적 대안만이 현실적인 시대

이런 지젝의 시대 인식은 지금 한국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가령 내년 봄까지 계속될 대통령선거 국면을 생각해보자. 벌써부터 여러 후보가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각 후보가 야심찬 공약을 내세울수록 이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제기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유토피아적'이라는 낯익은 비판도 있다.

코로나19-이후 시대에 '유토피아적'이라는 이 비판 논거는 과연 동료 시민들의 선택에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를 읽고 난 뒤라면, 이 물음에 그리 긍정적인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없는 곳)라는 딱지가 '비현실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려면, 우선 '토피아'(있는 곳)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곳'과 '없는 곳' 사이의 너무 먼 거리, 그것이 이른바 '유토피아적' 대안들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지금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고 있는 것은 바로 '토피아'다. 팬데믹 이전의 일상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벨 에포크'(좋았던 시절)처럼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향수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문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향수' 쪽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토피아'에 닻을 내린 지향과 노력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이다. 역설적으로 '유토피아적' 대안만이 현실적일 수 있다. 이런 대안만이 지젝의 다음과 같은 요청으로 향하는 출구일 수 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다. 무지에의 의지라는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기꺼이 팬데믹을 사유할 것인가? 팬데믹을 생화학적 건강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에서 우리 인간이 점유하는 위치와 우리의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포괄하는 복잡한 총체성에 뿌리를 둔 어떤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이 선택으로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일상성을 만들어내는 결정을 해낼 것인가?" (위의 책, 202-203쪽. 강조는 원저자의 것)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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