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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5. 정의당, 확실한 지지세력의 부재와 조직적 과제

: 총노선과 노동의 측면에서
  • 입력 2022.06.14 14:24      조회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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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정의당, 확실한 지지세력의 부재와 조직적 과제-한석호.pdf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운동을 한다. 민주노동당 때부터 줄곧 진보정당 당원이다. 노동운동의 기존 문법과는 다른 주장을 펼치면서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다. 주장의 핵심은 나눔과 연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회연대전략 및 연대주의이다. 노조 바깥 노동을 조직하려고 노동공제연합 풀빵을 만들고 운영위원장 역할을 하고 있다. 시민사회운동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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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고 요청을 받았다. 마감까지 40일의 시간이 있었다. 여유 있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정의당에 대해 쏟아내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진보정치에 대한 답답함을 털고서 희망의 전망을 공유하고 싶었다. 원고 요청에 선뜻 동의했다. 그래놓고 30일간 전전긍긍했다. 노조 바깥의 노동을 사회 주체로 세우려고 벌여놓은 노동공제운동이 글 쓸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다, 시간 부족은 핑계다. 사실은 글을 어떻게 쓸까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정의당의 문제는 무엇인지, 진보정치는 왜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하고 싶은 얘기는 굴뚝인데 글의 구상이 잡히지 않았다. 고구마를 먹다가 식도가 막힌 느낌이었다. 그러는 동안 원고 마감 시한이 다가왔다. 더 갈팡질팡하다가는 편집자의 속까지 태울 것이 뻔했다. 답답함을 털지 못한 채 시작한다. 글이 거칠 것이다.


1. 정의당은 누구의 어떤 정당이지?

  정의당은 누구의 정당인가, 주변에 묻는다. 노회찬이 있었고 심상정이 있는 당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정의당은 어떤 정당인가, 주변에 또 묻는다. 페미니즘 정당이다, 아니다,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정의당은 어떤 정당인가, 주변에 다시 묻는다. 민주당 2중대다, 아니다, 다시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정의당은 뭐 하는 정당인가. 주변에 또다시 묻는다. 더는 반응이 없다. 할 말 다 했는데 뭘 자꾸 묻느냐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섭섭한 마음에 대신 답변한다. 정의당은 진보정당이다. 그러면 주변에서 되묻는다. 진보정당은 뭔데? 그래서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진보정당은 뭐지? 정의당은 누구의 정당이고,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나가려는 정당이지? 
  정의당을 둘러싸고 페미니즘 정당이냐 아니냐, 민주당 2중대냐 아니냐,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서 여성 차별과 성폭력 사안 등이 발생할 때마다 벌어질 수밖에 없는 논란이다. 진보정당은 생태 정당이 되어야 하고, 노동 정당이 되어야 하듯, 페미니즘 정당도 되어야 한다. 정의당이 여당이나 제1야당이 돼서 정치연합을 주도하는 지위를 얻기 전까지는 필요에 따라 민주당 2중대 비판을 감수해야 하고, 더 나아가 국민의힘 2중대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 연대·연합이라는 정치의 속성상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정의당을 떠올리며 노회찬과 심상정을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선거를 통해 표를 얻는 정치에서는 당을 대표하는 상징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 
  정의당의 진짜 문제는 거기서 멈춰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갑론을박과 민주당 2중대 비판을 넘어서는 정의당의 체계적 사회 청사진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보이는 것은 몇몇 단편 정책이다. 또 상징 정치인의 유무와는 다른 차원인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의당을 상징하는 계급계층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청사진이 안 보이고, 상징하는 계급계층이 안 보이는 것, 이것이 정의당의 근본 문제다. 
  위 문단을 쓰면서 글자를 고쳤다. 처음에는 청사진이 없고 상징하는 계급계층이 없다고 썼다. 없다는 표현에 대해 정의당 당직자와 공직자들이 서운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안 보인다로 고쳤다. 그렇게 바꿔놓고도 안 보인다는 글자 위로 없다는 글자가 겹쳐 보인다. 
  20대 대통령선거에서 정의당은 2.37%를 얻었다. 19대 대선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완주했다는 안도감에 상처받지 않았다. 개표 당일 밤 답지한 12억 원의 후원금에는 기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2.37%라는 득표율이 무겁게 다가왔고, 실망감이 커졌다. 그러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사회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 뚜렷하지 않은 정당, 게다가 확고한 조직기반도 없는 정당이 그만큼 얻은 것만 해도 적지 않은 득표였다. 그런 상태로 지난 10년간을 버텨왔다는 것만 해도 대견한 성과였다. 
  문제는 한계점에 왔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앞으로의 10년을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다. 징조를 곳곳에서 확인하고 있다. 진보 지지층이 민주당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국민의힘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포착되고 있다. 그 상황에서 진보정치의 새로운 지지층이 형성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2. 노동 없는 정의당

  정의당의 조직기반을 다져야 한다. 그 첫 번째는 노동이다. 노동을 지지기반으로 재조직해야 한다. 세계 진보정치의 출발은 노동계급이었다. 노동계급에 집중된 불평등을 타파하는 과제가 진보정치의 출발이고, 핵심 존재 이유였다. 과거처럼 결합력이 강하지 않고 노동자 일부가 보수정치를 지지하고 있지만, 지금도 유럽을 비롯한 세계 진보정치의 핵심 기반은 여전히 노동이다. 한국 진보정치도 출발은 똑같았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열었고 성장을 뒷받침했다. 노동은 민주노동당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의당에는 노선과 구성원과 지지기반 측면에서 노동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부차적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많이 늦었고 상황은 악화했지만, 포기하면 안 된다. 민주노동당 지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조직노동을 붙들어야 하고, 진보정당의 본원적 의미인 노조 바깥 하층 노동을 붙들어야 한다. 조직노동은 응집력이 약해지고 있어 과거 같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조직력을 지니고 있고, 노조의 정치방침이 일정하게 작동한다. 미조직노동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지만, 불평등 사회의 하층에서 진보정당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노동은 진보정치의 기초다. 정의당은 노동이라는 기초를 다지면서, 그 위에 청년과 여성, 녹색과 노인 등을 세워야 한다. 기초 없는 기둥은 비바람에 흔들리고 무너진다. 정의당의 지난 대선 결과였고, 앞으로의 불안한 상태다.     
  정의당과 노동이 분리된 원인을 되짚어 본다. 정의당과 노동이 분리되는 과정에는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과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이라는 2차에 걸친 진보정당 분당 후유증이 작동했다. 진보정당이 분당하면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은 정의당(진보신당)과 진보당(민중당)의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었다. 정의당과 진보당의 계속되는 갈등에 노동운동은 진보정치에 거리를 두었다. 그에 따라 정의당 안에서 노동의 목소리가 약화했다. 그러는 사이 민주당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노동을 휩쓸어갔다. 정의당은 채 성장하기 전에 조직기반을 잃었다. 
  그럼에도 분당만으로는 정의당에서 노동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한 배경을 설명할 수 없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과 상관없이 정의당은 노동을 진보정치의 지지기반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펼쳤어야 했다. 노동이 진보정치의 토대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도, 표 계산으로도 노동은 가장 많은 숫자를 가진 계급계층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방치한 채 진보의 꿈을 펼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체 정의당이 노동을 소홀히 하고 또 조직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의당의 많은 이들은 그 이유를 여성·청년에 집중한 전략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당 지도부에 화살을 돌린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 이유다. 여성·청년에 집중하는 전략과 노동을 조직하는 전략은 지지기반을 조직한다는 측면에서 충돌하는 전략이 아니다. 여성·청년을 집중 전략으로 설정하는데 바빠서 노동을 집중 전략으로 취하지 못한다 해도, 정의당은 보조전략으로라도 노동을 조직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3. 불평등의 측면에서, 노선 없는 정의당 

  정의당이 노동과 멀어진 근본 원인은 정의당이 한국의 불평등 심화를 외면하는 것에 있다. 
  2014년에 김낙년 교수가 ‘한국의 개인소득 분포: 소득세 자료에 의한 접근’이라는 논문을 내놓으면서 한국의 불평등 문제가 사회 화두로 떠올랐다. 진보언론, 보수언론 가릴 것 없이 기사를 쏟아내고, 이후의 각종 통계와 자료에서도 더 확인됐다. 또 이후에 토마 피케티 등의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불평등이 미국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또 그것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상황에서도 정의당은 남의 나라 상황 대하듯 태평했다. 
  불평등을 완화 또는 해소하는 것은 진보정치의 여러 가치 중에서도 중심 가치의 하나인데, 정의당은 외면했다. 보려고 하지 않았고 구상하지 않았고 무능력했다. 정의당이라는 총체로써 고민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불평등 심화에 관한 관심과 이해와 해법이 없으니, 노동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불평등을 완화해야 하겠다는 방향을 분명하게 세웠다면, 노동을 조직해야겠다는 전략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닌, 정의당 전체의 문제였다. 정의당의 그 어떤 단위도 불평등 심화에 관한 관심과 체계적인 해법을 내놓지 않았다. 당 안팎의 논쟁을 만들지 않았다. 
  사실 그 문제는 정의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진보의 공통적 문제다. 특히 노동운동의 심각한 문제다.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공허한 외침만 있지, 불평등의 실제에 대한 분석도 없고, 해소하려는 의지도 정책도 없다. 정의당은 그 상황에 숨어서 책임을 모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진보정치 대표주자로서의 자격 상실이다. 

  1) 10대90 불평등의 사회적·계급적 함의    
  자본주의 초기에는 사회 구성원 절대다수의 기본적 의식주조차 보장되지 않을 만큼 1대99 불평등이 사회 문제의 핵심 요소였다. 러시아와 동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절반이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한 배경이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물적 토대가 성장하면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의식주 및 최소한의 교육·의료 등이 보장되면서 사회를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불평등은 10대90이다. 자존감이라는 인간의 특성 때문이다.
  절대적 차원의 삶이 보장되면, 인간의 계급계층 관계는 사회체제라는 거시 범주에서 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골목·장터·직장·거리 등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세세하고, 때로는 좀스럽다고 느낄 정도의 미시적 범주에서 발현된다. 일상에서 대다수 인간은 저 멀리 있어서 비교할 수도 없는 최상위 1%의 부 때문에 화가 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내 옆에 있어서 곧바로 비교 대상이 되는 이웃과의 차이 때문에 더 화나고 절망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자신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데, 자신에게 없다고 느끼는 몇만 원, 몇십만 원, 몇백만 원에 집착하고 상처를 입는다. 그것 때문에 자신과 가족의 삶의 질이 달라지고 자존감이 무너지는 현실이 답답한 것이다.
  전쟁·재난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인간은 대의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으나, 일상에서의 인간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정도로 쪼잔하다. 차를 몰다가 발생하는 사소한 마찰로 주먹 다툼까지 해서 사법 심판을 자청하는 행동, 얼마 되지 않는 상속 문제로 파탄 나는 가족 관계, 돈 몇 푼 때문에 단절되는 친구 관계, 누군가의 사소한 비난에 밤잠을 설치는 모습, 술값 5만 원은 아깝지 않고 100분의 1에 불과한 일회용 라이터값은 아깝다는 심리 등 인간 세상에서 어렵지 않게 접하는 현상이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인간의 한 특징은 계급계층 관계에서도 발현된다. 
  10대90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의 연대를 어렵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1대99의 불평등 심화는 99가 1을 몰아치면 된다는 심리를 형성하지만, 10대90의 불평등 심화는 사회 구성원 전반에 추격과 경쟁과 질투 심리를 확산시킨다. 추격에서 낙오한 구성원에게 절망을 강요한다. 한국의 불평등은 그 지점에 있다. 그런데 정의당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없다. 

  2) 미국을 추월한 한국의 10대90 불평등   
  10대90의 불평등 측면에서 한국은 세계의 대표적 불평등 국가인 미국을 추월했다. 표-1은 토마 피케티 등 각국의 불평등을 연구하는 세계 각국 100여 명의 학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ID)에 근거한 통계다. 
 

<-1> 소득 불평등 비교 (2020년 세전 소득 기준)
  상위 10% 나머지 90%
최상위1% 차상위9% 소득합계 중위40% 하위50% 소득합계
스웨덴 10.5(%) 20.3(%) 30.8(%) 45.4(%) 23.8(%) 69.2(%)
미국 18.8(%) 26.7(%) 45.5(%) 41.2(%) 13.3(%) 54.5(%)
한국 14.7(%) 31.8(%) 46.5(%) 37.5(%) 16.0(%) 53.5(%)
* 출처: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 WID)


  먼저 북유럽 스웨덴의 2020년 소득분위별 점유율이다. 스웨덴 총소득에서 최상위 1%는 10.5%(평균소득의 10.5배), 차상위 9%는 20.3%(2.25배)를 점유하고 있다. 최상위와 차상위를 합쳐서, 그러니까 상위 10%의 점유율은 30.8%(3.08배)다. 그리고 중위 40%는 45.4%(1.13배)를 점유하고 있고, 하위 50%는 23.8%(평균소득의 0.47)를 점유한다. 스웨덴은 상위 10%가 총소득의 30%를 점유하고, 나머지 90%가 70%를 점유하는 구조다. 
  다음은 미국이다. 최상위 1%가 총소득에서 무려 18.8%(평균소득의 18.8배)를 가져간다. 100명이 먹어야 하는 100개의 빵 중에서 혼자 19개를 먹는 형국이다. 1대99의 전선을 친 아큐파이(occupy) 운동이 힘을 얻은 배경이다. 차상위 9%는 26.7%(2.97배)고, 중위 40%는 41.2%(1.03배)를 가져간다. 하위 50%는 13.3%(0.27배)인데, 빵 1개로 4.5명이 나눠 먹는 형국이다. 세계의 대표적 불평등 국가답다. 
  다음으로 한국을 보자. 최상위 1%는 14.7%(14.7배)를 점유했다. 차상위 9%는 31.8%(3.53배)를 점유했다. 중위 40%는 37.5%(평균소득의 0.93)였다. 하위 50%는 16.0%(0.32)였다. 이렇게 서술하고 끝내면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서 통계를 찬찬히 읽어봐야 한다. 충격적 통계다. 10대90의 불평등에서 한국은 미국을 앞질렀다. 미국의 상위 10%는 45.5%를 점유하는데, 한국의 상위 10%는 46.5%를 점유한다. 그래도 정의당은 태평하다. 그러다 보니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한국의 중위 40%도 중위소득의 1에 미치지 못하고, 하위 50%는 0.32에 불과하다. 그래도 정의당은 태평하다. 이 정도의 불평등은 별것 아니란 말인가. 정의당은 정말로 진보정당 맞나, 자꾸만 의문이 든다. 
  정의당을 너무 심하게 몰아세우는 것 같다. 정의당도 한국의 불평등 심화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기는 했다.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 정도는 민주당도 했고 국민의힘도 했다. 불평등 심화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공통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있다. 한국의 불평등에 대해 언론, 정치, 노동운동, 학계, 시민사회 등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부문이 심각성을 인정한다. 진보뿐 아니라 보수도 심각성을 인정한다. 그런데 한결같이 통계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고, 해소방안으로써는 복지와 안전망에만 초점을 둔다. 민주당과 국민의힘과 정의당 등이 불평등 완화의 해법으로 내놓는 대안은 그 범주 내에서의 정책이다. 소득 분배 자체의 조율 문제와 세금 정책을 통한 재분배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회피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이야 그렇다 치고, 정의당은 왜 그러고 있지? 정의당은 두 당과 달리 불평등 문제에 대한 총노선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3) 당혹스러운 상황, 불평등 수혜자가 된 조직노동의 주류  
  노동운동뿐 아니라, 한국의 진보정치와 정의당은 난감한 상황에 있다. 노동운동의 주축이고, 진보정치의 지지기반으로 구축해야 할 조직노동이 심화된 불평등의 수혜자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표-2는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통계다.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만든 통계다. 한국의 소득은 노동자가 자영업자보다 더 높다. 전체 계급계층으로 통계를 낸다면, 상위 50%에 속한 노동자는 표-2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것이다. 

<표-2> 소득분위별 노동자 평균 연 소득 및 하한액 추이(2017-2018년), 단위 : 만원

연봉순위(상위%) 평균연봉 연봉하한액
'17 '18 증감 증감률(순위) '17 '18 증감 증감률


10분위(0~10%) 9,620 9,931 311 3.2%(9) 6,746 6,950 204 3.0
9분위(10~20%) 5,714 5,893 179 3.1%(10) 4,901 5,062 161 3.3
8분위(20~30%) 4,365 4,528 163 3.7%(8) 3,900 4,064 164 4.2
7분위(30~40%) 3,548 3,701 153 4.3%(7) 3,236 3,380 144 4.4
6분위(40~50%) 2,967 3,105 138 4.7%(6) 2,720 2,864 144 5.3
5분위(50~60%) 2,507 2,639 132 5.3%(4) 2,335 2,434 99 4.2
4분위(60~70%) 2,140 2,290 150 7.0%(3) 1,950 2,153 203 10.4


3분위(70~80%) 1,801 1,988 187 10.4%(1) 1,652 1,888 236 14.3
2분위(80~90%) 1,416 1,562 146 10.3%(2) 1,080 1,166 86 8.0
1분위(90~100%) 656 689 33 5.0%(5) 72 72 0 0.0
전체 3,475 3,634 159 4.6 - - - -

* 출처: 한국경제연구원 「임금근로자 소득분위별 연봉 분석 보도자료」(2019년 9월 23일).; 고용노동부,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2017년, 2018년 원시자료) <연봉 = (6월 급여액 + 12개월) + 전년도 연간 상여금, 성과급 총액, 대상은 고용주, 자영업자, 무급가족 종사자 등 비임금근로자, 특수형태근로종사자자를 제외한 임금근로자>」 근거 

  2018년 기준, 연 소득 6,950만 원이면 상위 10%에 진입했다. 5,062만 원이면 상위 20%에 진입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조직노동 주류는 모두 그 범주에 들었다. 노조 바깥 하위 50%의 연 소득은 2,864만 원 미만이었다. 노동자 절반이 그렇다는 것이다. 노동이 상위 10%와 하위 50%로 분단됐다.
  김유선 박사가 국세청 천분위 통합소득(근로소득 + 종합소득, 일종의 세전 시장소득)을 바탕으로 계산한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2020년 기준, 연 소득 1억8천만 원이면 한국 사회 상위 1%고, 1억 원이면 상위 5%, 7천7백만 원이면 상위 10%였다. 
  정의당이 조직노동과 멀어진 심리적 배경의 하나다. 진보정치는 불평등의 수혜자인 상위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의당은 불평등의 피해자인 하위 50% 노동에는 천착했는가? 그것도 못했다. 상층노동과는 멀어지고 하층노동에는 무관심한 것이 정의당의 상태다. 물론 진보당과 노동당 등 진보정치가 모두 똑같은 상태다. 



  이제석 광고연구소의 세계인권선언 65주년 기념 퍼포먼스를 응용해서, 청년예술가 김동희가 그린 그림이다. 참으로 불편한 그림이다. 한국 사회 모두가 이러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의당은 그렇지 않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정의당은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비정규직을 일으켜 세우고 그 자리에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 


4. 노선의 핵은 ‘정의’ 

  조직노동의 주류가 불평등의 수혜자라고 해서 정의당이 지금처럼 계속 조직노동과 멀어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조직노동의 눈치를 보면서 소득 분배를 조율하는 과업과 세금 정책을 회피해서도 안 된다. 스웨덴처럼 상위 10%가 30%의 소득을 점유하고 나머지 90%가 70%의 소득을 점유하는 ‘삼칠사회’를 만들기 위한 긴 장정을 시작해야 한다. 빠르면 10년, 늦으면 30년의 목표를 향한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그 출발점을 노동과 함께해야 한다.
  물적 토대가 성장해서 하위 50% 계층도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적 방식의 소득 평등주의 계급론과 운동론으로는 불평등 문제를 완화할 수 없다. 더구나 조직노동의 주류가 상위 10%를 넘어 상위 5%로 진입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한 기획이다. 스웨덴 수준으로 평등도를 높이려면 최상위 1%만이 아니라 차상위 9%의 소득 점유율을 대폭 낮춰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최상위 1%의 점유율을 1로 만든다 해도, 차상위 9%의 점유율을 낮춰야 한다. 한국 차상위 9%의 점유율은 31.8%다. 스웨덴 상위 10%의 점유율 30.8%보다 더 높은 상태다. 
  현재를 규정하는 한국 사회운동의 출발점은 80년대 구축되기 시작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소득 평등주의였다.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면 된다고 하는 구조주의였다. 진보정치도 그 기획에서 출발했다. 자본주의 물적 토대가 성장하고 하위계층도 음식물 쓰레기를 남겨서 사회적 골치가 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낡은 노선이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 그 기획은 사라졌다. 낡은 것은 갔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상태, 정의당의 총노선에도 적용되는 경구다. 
  답은 정의당의 당명인 ‘정의’에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당 내부에 질문한다. 대부분 우물쭈물한다. 정의의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답변은 거의 없다. 프랑스대혁명의 3대 가치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인데, 세계 진보정치가 평등과 정의를 동등한 범주로 다루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답변은 더더욱 없다. 
  정의의 핵심은 적정한 수준의 평등, 즉 적절한 수준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소비에트연방 방식의 균등한 소득 평등주의 기획은 이기성과 이타성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특성상, 이타성만을 뽑아내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분석을 근거로 한다. 협력과 경쟁이라는 인간사회의 특성상 협력만을 운영원리로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회학적 분석을 근거로 한다. 
  인간의 이기성과 사회의 경쟁원리를 그대로 인정하되, 연대를 통해 정의로운 복지·연대·생태사회를 구축하자는 것이 정의당의 ‘정의’에 담긴 핵심 철학이다. 그것을 체계화하면 된다. 그래서 정의당의 총노선을 만드는 것, 그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그러면 불평등의 수혜자가 된 조직노동을 지지기반으로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다. 미조직노동을 정의당의 지지기반으로 만들 수 있다. 사회의 동의와 공감도 얻을 수 있다.          


5. 전략위원회 구성 제안

  노동, 청년, 여성, 생태, 소수자, 시민운동 등을 나열하면서 정의당의 지지기반으로 만들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그것을 쓰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 봐야 별 소용이 없겠다는 판단을 했다. 국민에게 정의당을 설명할 수 있는 명확한 노선이 없는데, 조직화 방안을 만든다고 해서 각계각층이 정의당으로 결집하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노선 없는 정의당, 노동 없는 정의당의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정의당 바깥이 멀어지기만 한다. 정의당을 떠받치고 있던 당 내부마저 흐트러지고 있다. 산토끼는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데, 산토끼를 불러모아야 할 집토끼는 체력을 소진한 상태다.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정의당 당원조차 당에 대한 감동이 없다. 위기다. 
  전략위원회를 제안한다. 정의당 지도부가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당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정의당의 총노선을 논의하고, 각계각층 조직방안을 만들고, 당원 토론을 조직하는 전략위원회를 제안한다. 지금 정의당에 꼭 필요한 과정이다. 


[참고문헌]

김유선, 페이스북 페이지(2022.2.28.).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 WID), 국가별 데이터, 스웨덴, 미국, 한국. https://wid.world/
한국경제연구원, 2019.9.23., 「임금근로자 소득분위별 연봉 분석 보도자료」.
한석호, 2022.1.3., “평등주의 노동운동은 끝났다”,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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