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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다시 노동조합에 주목하자

100년 전 변혁운동에는 있었고 우리 시대 포퓰리즘에는 없는 것
  • 입력 2021.02.17 11:00      조회 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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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에서 세 차례에 걸쳐 능력주의와 그 극복 방향을 다루면서, 결론으로 인간의 다양한 능력들을 대변하는 자발적 결사체들이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그 대표적인 맹아는 노동조합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이 언급에 머리를 갸우뚱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 노동조합은 현실 문제들의 대안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문제들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는 처지다. 30여 년 전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세태 변화가 참으로 무섭다. 아니,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노동조합은 변화를 말하는 이들 사이에서 과거만큼 권위를 인정받거나 기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시대이기에 오히려 짧은 글로나마 노동조합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을 수 없겠다. 시대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슬러, 왜 하필 지금 시점에 다시 노동조합에 주목해야 하는지, 현재 노동조합에 근본 문제가 있다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변화의 방향은 무엇이고 어디에서부터 가능한지, 생각을 나누고 싶다.

지난 세기 초 변혁운동에는 있었고 우리 시대 포퓰리즘에는 없는 것

우리는 지금 유별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모르긴 해도 최소한 거대한 동요의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자본주의 중심부 곳곳에서 전에 없던 정치적 격동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대중의 불만이 이른바 '포퓰리즘' 세력에 대한 지지로 분출하곤 한다.

그런데 이게 이번 세기 초만의 현상은 아니다. 지난 세기 벽두에도 전 지구적인 소요와 폭발이 있었다. 아니, 20세기 초의 격동이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에서 격렬한 노동자 투쟁이 빈발했고, 더구나 총파업(자주 정치적 성격을 동반한)과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이라는 전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이들 노동 세력은 여성운동(특히 영국의 경우) 등과 함께 보통선거제도 실시, 즉 대의민주주의의 강화를 요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조차 대중투쟁의 발전을 잠시 지연시켰을 뿐 이를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노동자 투쟁이 부활했고, 많은 나라에서 조합원 수가 배로 늘어났다. 또한 드디어 보통선거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했고, 각국에서 첫 번째로 실시된 대중투표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좌파정당이 제1당으로 부상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워낙 극적이어서 다른 모든 사건을 압도하기는 했지만, 실은 이 혁명조차 20세기 초에 전개된 전 지구적 격동의 일부, 그 한 고리였다 할 수 있다.

이러한 100년 전 격동과 지금의 그것 사이에는 한 가지 중대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서로 상당히 비슷한 역사적 국면에 대한 거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이다. 둘 모두,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운동이라 규정한 바가 지배하던 시기를 끝내며 대두했다. 20세기가 밝아오기 직전의 100여 년이 바로 이러한 시장화 운동의 전성기였고, 현 시대 역시 '신자유주의'라 불린 시장화 운동의 절정기 뒤에 시작됐다.

폴라니는 시장화 운동이 전개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에 맞서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이 함께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이중 운동'). 이런 시각에서 보면, 20세기 초에 공장과 거리에서 벌어진 반란과 우리 시대에 투표소에서 돌출하는 반란은 모두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이 극적으로 폭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기본 성격이 일치하는데도 양상은 전혀 다르다. 100년 전에는 대중이 주도하는 변혁운동이었는데, 오늘날은 포퓰리즘 세력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대의민주제의 발전 여부다. 20세기 초는 계급, 성별에 따라 대의제 참여가 제한돼 노동자, 여성이 보통선거제도 실현을 위해 싸워야 한 시대이고, 현재는 인류 역사상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광범하게 뿌리 내린 시기다. 그래서 지난 세기 초의 대중이 우선 직접 행동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 반면 지금은 대다수 대중이 일단은 현실 정치 수단을 통해 의사를 표시하려 한다. 그리고 이런 현대의 대중에게 기성 정치에 충격을 줄 준비된 선택지로 존재하는 게 다름 아닌 포퓰리즘 세력이다.

둘째는 노동조합의 역할이다. 100년 전 대중은 대의민주제라는 통로가 없었던 대신에 노동조합을 통해 집단적 힘을 표출하려 했다. 노동조합을 신뢰했고, 이에 가담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지금도 물론 노동조합은 존재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한 세기 전만큼은 반란의 주된 수단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사는 대중의 대부분이 노동조합 영향권 바깥에 있으며, 과거 세대와 달리 집단적 해결책을 추구하지 않는 문화가 이미 깊이 뿌리내렸다는 분석까지 있다.

이 두 요인이 결합할 때에 대중 반란이 취할 수 있는 일차적 형태가 곧 포퓰리즘이다. 노동조합과 같은 자발적 결사체로 뭉치지 못한 채 기성 대의민주제에만 의지해 전개될 수 있는 저항이란 주류 사회의 용인을 벗어난 정치 세력을 선택하는 일뿐이다. 샹탈 무페 등이 제시하는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결국 좌파가 이런 상황을 인정하며 내놓은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거대한 퇴행이다. 20세기 초 변혁운동과 우리 시대의 포퓰리즘 사이에는 커다란 뒷걸음질이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했다지만, 체제의 문제점을 공격하고 이를 바꿔내는 사회 전체의 역량은 퇴보한 것이다. 100년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 즉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대중운동의 적극적인 역할이라는 요소를 빼놓고는 역사의 이 미스터리를 설명할 수 없다.

완전고용 국면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 노동조합

그럼 노동조합이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잃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대기업 정규직 중심이라든가 기업별 노동조합 형태라는 한국적 특수성을 통해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짚는 논의가 많다.

한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게 한국 노동조합만은 아니다. 오랫동안 산업별 노동조합 형태를 취해왔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전성기에 상당한 성취까지 이뤘던 서유럽 여러 나라의 노동조합까지도 요즘은 불평등의 해결자가 아닌 원인 제공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어느 나라나 노동조합 때문에 노동시장이 분절돼 있다는 것이다. 고용이 상당히 안정되고 소득이 높으며 노동권도 제대로 보호받는 '내부' 노동시장과 그 반대편의 '외부' 노동시장으로 다들 나뉘어 있는데, 이리 된 게 노동조합 탓이라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인 한국의 기업별 노동조합들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산업별 노동조합들까지도 기존 조합원들만을 위한 단체협약을 통해 이런 이중 노동시장 구조의 원흉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실의 엄밀한 기술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대중도 이미 이를 어느 정도 알기에 노동조합을 불신하거나 거리감을 느낀다. 적어도 이것이 새롭게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려야 할 불안정 노동자 혹은 '프레카리아트'가 노동조합을 효과적인 문제 해결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는 주된 이유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은 이제 한물 간 존재일 뿐인가? 노동조합이라는 변수는 아예 지워버린 채 현실을 변화시킬 방법과 대안 사회의 밑그림을 구상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조합의 문제가 노동자들의 자발적 결사체라는 그 근본 속성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중심부 노동조합에 깊이 뿌리 내린 역사적 관성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관성인가? 간단히 말해, 완전고용 국면에서 익숙해진 존재 방식과 행동 양식이다. 신자유주의 국면이 시작되기 전에 북미와 서유럽에서는 한 동안 완전고용이 지속됐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의 완전고용 국면이었고, 상대적으로 장기간 지속됐으며, 지금까지 이런 국면이 복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은 '유일한' 경험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은 대서양 양안 국가들처럼 케인스주의 거시 경제 운용을 통해 완전고용을 이룬 적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3저 호황과 노동자 대투쟁의 효과가 함께 나타난 1980년대 중반에서 외환위기에 이르는 시기에 잠시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가 지속됐다.

이런 완전고용 국면에서 계급 이익에 충실한 노동조합이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전략 중 하나는 투쟁력-협상력이 가장 강한 부문이 '따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따내는' 것이다. 해당 국민경제의 국제수지에 커다란 충격을 주지 않는 한, 이렇게 협상력이 가장 강력한 부문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한 단체협상 결과는 다른 부문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분파주의가 아니라 정반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협약 내용은 다른 부문의 노사 협상을 견인하는 일종의 '모범' 협약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드는 주된 요인은 물론 완전고용 상황이다. 완전고용 상태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을 고용할 자본가를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자본가가 자신이 고용할 노동자를 찾아 다녀야 한다. 따라서 어느 자본가든 '모범' 협약에 근접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바라는 만큼 노동력을 확보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기업별이든 산업별이든 가장 협상력이 강한 부문이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협상 결과가 노동계급 전반에게 이로운 노사 관계의 기준점이 된다.

그러나 이 역사적 국면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서유럽에서는 늦어도 1980년대에는 새 국면에 자리를 내주었고, 한국에서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단명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완전고용 국면에서 익숙했던 습성과 논리를 지속하고 있다. 지나간 시대의 관성이 부조리할 정도로 끈질기게 이어진 것이다.

강력한 협상력을 지닌 부문이 '따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따낸' 결과는 이제 노동계급 전체의 권익을 견인하는 '모범' 협약은커녕 전자와 나머지 노동자들 사이의 골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전자가 더 많이 따내는 만큼 나머지의 몫이 줄어드는 상관관계까지 나타났다. 그럼에도 협상력이 강한 부문은 오랫동안 익숙해온 관성을 한 세대 넘게 더 지속했으니, 그래야 고용 불안 시대에 중산층 지위를 어떻게든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전 세계 노동조합은 협상력이 가장 강한 부문의 이런 논리에 적응하며 유지됐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든 한국에서든 자본주의 중심부라면 어느 곳에서나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현 국면에 비해 한 세대 이상 지체된 시대착오적 대중조직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런 전반적 퇴행 속에서도 서유럽의 유서 깊은 초기업 단위 노동조합과 한국의 기업별 노동조합 사이에는 분명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정의로운 녹색 전환을 위한 산업인 연합으로

이제 우리는 서로 모순되는 두 표지판 사이에 서 있다. 하나는 포퓰리즘을 넘어선 사회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동조합이 다시 필요하다는 요청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이 완전고용 국면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본주의 변화에 완전히 추월당했다는 현실이다. 둘의 충돌에서 나오는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조합이라는 가장 유서 깊은 대중조직 없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럼 노동조합은 지금의 모습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이를 중심에 놓는 어떠한 미래 전망도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시급히 타진해야 할 것은 노동조합의 근본적 전환이다. 현실 노동조합의 구성 요소들에서 출발하되, 노동조합운동 전반을 우리 시대의 요청에 맞게 철저히 뜯어고치는 것이다. 전환의 주요 내용으로는 이 글의 논지만으로도 두 가지를 끌어낼 수 있다.

첫째는 완전고용의 새로운 실현이다. 21세기에 이를 가능케 할 방안, 혹은 과거의 완전고용에 유사한 어떤 상태를 만들어낼 방안이 무엇인지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국가-사회의 개입을 통해 이를 실현하는 게 노동조합의 근본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 점에서 노동운동의 이념적 전통과 지향이 새롭게 강조되어야 한다.

둘째는 오랜 역사적 관성과 단절한 노동조합의 새로운 존재 방식과 행동 양식의 구축이다. 이 점에서, 기후 위기 대응을 단순히 기존 노동조합의 위기로만 볼 게 아니라 새로운 노동조합의 기회로 봐야 한다. 노동계급 입장에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해 녹색 사회로 전환하되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바로 이 정의로운 녹색 전환을 기존의 단체협상 관행에 부가되는 과제가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의 새로운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말하자면, 탈탄소사회로 나아가는 산업인 연합들이 필요하다. 기존 노동조합들이 이런 연합의 기능을 새로운 중심 과제로 삼든가, 아니면 아예 이를 표방하는 새 노동조합들이 건설되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급격한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계속 대규모로 퇴출되거나 배제될 노동력, 아니 더 정확하게 산업 인력을 녹색 전환을 통해 재배치하는 가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역할을 중심에 둘 때에 노동조합은 그나마 협상력이 남은 부문을 중심으로 한 분파적 조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대중조직으로 거듭날 것이다.

결론은 기후 위기 대응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답답한 교착 상태를 뚫는 데 반드시 필요한 노동조합의 전환을 위해서도 말이다. 역으로 보면, 이렇게 전환된(적어도 전환 중인) 노동조합이 함께 할 때에만 녹색 전환은 비로소 진지하게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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