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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이 사라지는 시대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를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 입력 2021.02.02 11:00      조회 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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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글에 이어 이번에는 최첨단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가 낳는 한국 사회 불평등을 극복해갈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한데 그 전에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그것은 과연 능력주의가 이렇게 시끄럽게 다뤄야 할 사안이냐는 것이다. 21세기 불평등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상당히 기여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는 현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여러 부차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말하자면 불평등의 더 본질적인 측면을 해결해나가면 자연스레 누그러질 현상은 아닌가?

나올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그저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하기에는 능력주의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너무 불길하다. 가령 우리 시대에 평등을 실현하려는 대표적인 전망들을 보자. 그 가운데에는, 자본주의 발전은 결국 경제 활동 전반의 완전 자동화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한편으로 다수 대중을 실업 상태로 내몰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민기본소득과 노동시간의 보편적-획기적 단축이 동반되면 자유와 평등이 만개한 세상을 낳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나는 이런 비전에 크게 공감하지만, 만약 능력주의 문제를 계속 사각지대에 놔둔다면 이 구상이 실현될지라도 새로운 불평등이 사회를 덮칠 것이라 본다. 완전 자동화의 발단이 된 제3차 산업혁명(정보화)의 추세가 그러하다. 과학기술이 경제 활동에 보다 직접적으로 통합될수록 대중이 보유하던 기존 역량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지능에 바탕을 둔 단일한 위계제가 더욱 막강한 힘을 얻는다. 시장의 지배나 관료제를 축소시킬 수도 있는 기술이 오히려 지대 수익을 빨아먹는 거대 기업이나 더 고약한 관료기구의 기반이 돼버리며, 그럴수록 이 새 시스템에서 기회를 얻은 이들과 나머지 대다수 시민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간다.

이런 상태에 보편적 기본소득이 추가된다면, 적어도 기본소득 없는 경우보다는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빈곤에 내몰릴 위험이 적어질 뿐, 불평등의 근본적인 측면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불평등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는 소득의 불평등도, 심지어는 자산의 불평등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의 불평등이다.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등이 일정하게 교정되더라도 시민들 사이에서 결정권을 행사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지위의 차이가 지속된다면, 이런 사회는 민주주의를 안정되게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득이나 자산의 불평등이 언제든 재연, 확대될 수 있다.

한데 정보화는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자본-국가 관료체계의 중심에 얼마나 가깝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시민들의 지위가 달라지게 만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시민들이 이런 근본적 불평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저항하기는커녕 이를 경쟁의 결과로서 스스로 정당화하게 만든다. 능력주의가 존속하는 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추세인 정보화는 세상을 항상 해방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정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되고 말 것이다.

능력주의 극복 없이는, 정보화 시대에 평등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럼 능력주의를 극복할 방안은 무엇인가? 아니, 그 전에 능력주의의 지배가 더욱 확산하지 못하게 막을 힘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이제껏 능력주의 비판가들이 제시한 여러 대안이 모두 일리가 있다. 마이클 영이 강조한 것처럼 능력주의의 직접적 기반이 되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이에 맞설 장치들을 마련해야 하고, 능력주의의 신자가 된 지식인-중간층에게 각성을 촉구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에는 중대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지난 글("우리가 부르짖던 공정론의 민낯 ... 한국의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프레시안> 2021. 1. 21)에서 나는 지식인-중간층의 성장이 능력주의 확산의 강력한 추동력이 된 반면에 노동계급 문화의 존재는 이에 맞서는 균형추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노동계급 문화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역의 상관관계가 있는데, 이는 능력주의의 성장에 꼭 필요한 능력의 일원론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문화가 주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곧바로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노동계급 문화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우선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 노동계급 문화는 결코 바람직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서유럽 노동계급 문화는 당대의 다른 계급-계층과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주의에 중독돼 있었고, 사회주의 같은 요소와 결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반지성주의로 쏠릴 위험(오늘날 이미 나타나고 있는 위험) 또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노동계급 문화로 단순히 되돌아가자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어느 자본주의 사회든 지구화-금융화-정보화를 거치며 노동계급 구성 자체가 심각하게 변화했다. 제1차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에 뿌리내린 전통이나 제2차 산업혁명 중에 독일에 등장한 문화가 참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여기에 복제, 이식될 수는 없다. 심지어 지금의 영국과 독일에서조차 이는 불가능하다.

지금 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시기에 노동계급이 능력주의 확산을 막는 세력이 되게 만든 요소들을 추출하는 것이다. 과거의 노동계급이 부활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사뭇 다른 사회 주체들 사이에서 이들 요소가 새롭게 배양될 수 있을지 타진해봐야 하다. 그래서 한 세기 전의 산업 노동계급과는 다른 언어와 몸짓을 통해,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주의와는 전혀 다른 평등 관념을 견지할 사회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그럼 노동계급을 능력주의에 맞서는 역사적 대항 세력으로 만든 요소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위치'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기본적인 요소다. 자본주의 역사상 상당 기간 동안 노동계급은 교육 제도에 통합돼 있지 못했고, 국민 교육 체계가 발전한 뒤에도 고등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지금에 비하면 기계화 정도가 뒤떨어지는 만큼 노동 현장의 자율성도 컸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엘리트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역량과 덕성을 주장할 이유가 충분했다.

둘째는 '이상'이다. 혹은 '세계관', '이념'이다. 사실 위와 같은 노동계급의 위치는 패배감이나 열등의식을 낳을 수도 있으며, 실제 많은 경우 그러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위치에 이상이라는 또 다른 요소가 결합되는 경우에는 정반대 효과가 나타났고, 서유럽 노동계급의 많은 이들은 이 가능성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여러 좌파 이념을 통해 자신들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역이라 인식했다. 이럴 때에 그들의 일상은 패배자에게 남은 몫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가진 것과는 종류가 다른 역량과 덕성의 보고가 되곤 했다.

셋째는 '조직'이다. 능력주의가 힘을 얻기는 너무도 쉽다. 능력주의와 친화적인 막강한 조직들, 즉 근대 국가와 이를 닮으려 하는 거대 기업들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들 조직을 통해 능력의 일원론이 막강한 물질적 실체가 된다. 이에 맞서려면 당연히 대항 세력에게도 조직이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은 그러한 조직들을 실제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방어하는 조직이지만, 회사의 질서와는 별개로 노동자들만의 상호 인정이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국가나 기업과는 상관없이 노동자 조직들을 통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역량과 덕성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독특한 위치와 이상, 조직이 결합돼 어떤 힘의 자장이 구축됐다. 이 자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기준들에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발전의 전위 역할을 하던 시기에 견지하던 찬란한 덕목이다. 그들은 '주눅 들지 않는' 주체였고, 그래서 시민이 시민 되게 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불평등을 자신들의 패배의 결과가 아니라, 저들의 실패의 결과라 이해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승리할 집단적 기회를 요구했다. 현재의 패배자가 아니라 미래의 진정한 승리자로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능력주의 복합체를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구축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힘의 자장이다. 그러자면 이 시대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선 이들이 누구인지 식별해야 하고, 그들이 그 위치를 열등감이 아닌 항의의 기반으로 새롭게 이해하게 할 '이상'이 필요하며, 이 모두에 물질적 힘을 부여할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이들 요소의 결합을 통해 '주눅 들지 않는' 주체들이 형성되지 않는 한, 능력주의는 단순히 지식인-중간층 내부의 각성과 전환만으로는 결코 위축되거나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주눅 들지 않는' 주체의 뒷심이 될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에서 저자 마이클 영은 가상의 미래 능력주의 사회에 맞서 궐기한 이들이 발표한 '첼시 선언'을 소개한다. 이는 <능력주의>에서 영이 능력주의 극복의 방향을 제시한, 몇 안 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일부를 옮겨본다.

"계급 없는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소유하는 동시에 그런 가치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사회가 되리라.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모든 인간은 ... 세상에서 출세할 기회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되리라." (268쪽)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른 평가라? 너무 천진난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게 대안이라면, 능력주의 사회란 난공불락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여기에 '조직'이라는 변수가 개입된다면, 어떻겠는가? 가령 누가 뭐래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에 따라 평가할 조직들과 나란히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 평가하려 하는 조직들이 버티고 있다면 말이다.

영이 열거한 너무나 감성적인 단어들을 곧바로 평가 기준으로 들이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들 사이에는 소유인과 지능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참으로 다양한 역량과 덕성이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경작인이 있고, 공작인이 있으며, 예능인이 있고, 돌봄인과 봉사인이 있다. 바로 이런 각각의 능력을 중심으로 뭉친 대중의 조직들이 있다면? 모르긴 해도, 이 경우에는 누구도 '첼시 선언'의 문구들을 그저 웃어넘기기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대안 사회는 결코 개인과 국가, 기업만으로 이뤄진 사회일 수 없다. 그게 아무리 헌법상의 권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개인이나, 민주화된 국가, 사회화된 기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반드시 이들 사이에는 대중의 자발적 결사체들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다양한 능력과 덕성을 대표할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다만, 현실과 목표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금도 우리에게는 대중의 자발적 결사체라 할 수 있는 조직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거의 모든 현대 헌법이 특별한 존재로 다루는 노동조합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조합과 이 글이 논하는 조직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더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 간극이 유례없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조직이 필요하다. 만약 지금 있는 조직조차 바람직한 조직으로 전환시킬 수 없다면, 우리에게 그런 조직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에 대한 독후감에서 시작된 잇단 논의의 마지막 순서가 될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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